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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색 Apr 13. 2021

미워하지 않을 용기

미움은 타인이 아닌 자괴감에서 비롯된다

  어제 오후, 강설을 듣다가 ‘미움받을 용기’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이 문구는 한창 세간에 오르내린 적 있는 어느 책의 제목인 걸로 안다. 처세술 관련 서적을 싫어해서 읽어본 적은 없지만 제목을 잘 지어서인지 주제의식이 선명히 보인다.


  요즘 유난스럽게들 ‘토닥토닥’ 해주는 말이나 ‘공감능력’에 무척 열을 낸다. 먹고살기 좋아진 시대의 사람들의 마음이 그 어느 혼란의 시대보다 허할 수밖에 없는 거라고 본다. 부와 명예를 양껏 축적한 뒤에 오는 인생의 갈피 없는 허망함 때문에 마약에 찌들어 사는 그런 사람들처럼,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이 무엇으로도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쉽게 부를 쌓는 사람들이 부럽고, 대조되는 자신의 처지가 무가치한 존재로 여겨져 의기소침해질 것이다. 우습게도 인생의 목표라고 여겼던 부와 명예를 얻은 사람도 그다음 목표, 아마 지금 가진 것보다 더 높은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이상향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그러니 이 세상에 우리가 가시적으로 보거나 느낄 수 있는 것들이 행복 그 자체를 거머쥐게 해주지 못한다는 귀납적인 결론을 얻게 된다. 유명한 가수가 꿈이었던 사람이 이른 나이에 유명한 가수가 되고 나서는 그 길을 달려가도록 도와준 이정표를 잃게 된다.


  얼마 전에 영화 ‘소울’을 봤다. 재즈 아티스트가 꿈인 주인공이 인생의 종착지라고 여기던 그 꿈을 이룬 순간, 환희와 희열이 넘쳐흘렀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는 똑같은 그 재즈 바로 돌아가서 전날과 같은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다음 날, 그다음 날도 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의 예술성은 인정받았고, 사람들은 그의 연주를 좋아했다. 재즈 아티스트가 된 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업적이었다. 그의 나머지 일생은 그다지 잘 풀리지 않았고, 주목할 만한 눈부신 성과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일대기는 외롭고 초라한 흔적만을 남겼다.


  그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했다. 당신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화려한 성공인가, 아니면 매일의 평범한 일상을 보다 소중하게 영위하는 것인가? 역사에 크나큰 족적을 남길 만한 위업을 가진 인물이 되지 못한 수십, 수백억 명의 사람은 무의미하게 공중분해된 것인가?


  이제 그것을 체념했거나 포기한 사람들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토닥거려주고 있다. 그래도 괜찮아, 평범한 나도 가치 있는 존재야, 우리는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야,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말해주고 위로받길 바란다. 그런 ‘위로’ 트렌드가 내게는 간지럽다. 그리고 와 닿는 것이 없다. 해결책도 없고 깊은 통찰도 없는 삼류 글쟁이가 궁해서 아무렇게나 휘갈긴 낙서 같다.


  영화 ‘소울’을 보고 나서는 상당히 우울했다. 일생의 족적에 목을 맨 사람에게는 일상의 소중함이 소용없게 느껴진다. 현실 도피 중인 내게 심한 자괴감을 안겨주었다. 현실의 나를 보라. 돈벌이가 시급해진 상황에 내몰려서야 억지로 관심 없는 일을 하고, 그만큼 복지가 엉터리라 2년 이상을 버티지 못해 도망치듯 회사를 그만두었다. 서른 중반에 무직자 신세로 돌아왔다. 모아 놓은 돈도 얼마 되지 않는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이날 이때껏 학교 외에 달리 배워둔 예체능 기술도 없다. 가난에 볼모로 잡혀온 인생을 무엇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을지 몰라 매일 좌절과 열등감과 불안증에 시달려 산다. 같은 환경에서 자라온 형제들에 비해 유달리 부정적이고 우울하고 소심한 성격 탓에 인간관계도 가장 굴곡이 많았다. 작년은 부르기도 그럴듯한 2020년이었다. 해도 거듭났고 새로운 활력을 주는 친구들을 사귀며 드디어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가 싶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내 예상은 비껴갔다. 스스로 평판을 깎아먹는 실수를 몇 차례 저질렀고, 알게 모르게 구설에도 올랐으리라. 차츰 검은 뻘을 비웠던 시커먼 물이 한 층씩 차곡하게 흘러들어왔다. 사건을 명확히 보고 싶다는 핑계로 주변인들을 한 명, 한 명 욕하고 그들의 이름을 더럽혔다. 욕하면 욕할수록 자괴감은 제곱으로 두터워졌다. 그러곤 내 입으로 나 자신을 쓰레기라고 욕했다.


  난 무던한 사람이 아니다. 단순하긴 해도 어디에 마음을 써야 할지 가늠을 못하는 신경과민이다. 놀라울 정도로 자기중심적이고 마음이 유약한 사람이다. 실은 누굴 욕하고 싶은 게 아니라 선빵 필승의 법칙으로 상처 입기 전에 내가 좋아하지만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먼저 미워하는 것이다. 어리고 유치한 처세법이지만 성숙한 방식도 달리 통하는 경우가 별로 없는 걸 보아서 다른 사람들의 처세법도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자괴감과 열등감에 폭발한 직후가 어제였다. 사람들을 욕하고, 그리고 같은 입으로 나를 쓰레기라 욕했던 하루가 지난 어제 오후에,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에게 험담하지 말고 이웃의 좋은 소식에 귀 기울이되 나쁜 소문은 확실하지 않은 한 믿지 말라 하셨다. 이웃을 그윽이, 은밀히 허는 자의 기괴한 흉한 모습이 내게 투영되었다. 듣고 나니 그저 나를 욕하고 자기 비하를 할 게 아니라 반성하고 회개해야 했다. 너무도 흉한 몰골을 하고 앉아 있는 내가 끔찍이도 한심스러웠다. 괴로워서 마음이 아플 지경이었다.


  ‘미움받을 용기’라 했을 때 나는 하나의 객체에 불과했다. 미움을 받는 편에서만 나를 바라보게 되어 나도 남을 미워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배제시킨다. -이런 식의 자기 연민을 엄청 혐오한다.- 그럼 우리는 어쩌면 정신승리 내지는 처세술로 연약한 정신력을 강하게 기를 수는 있다. 그러나 내가 남을 미워했던 마음가짐을 반성하거나 성찰할 기회는 갖지 못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우리 사회는 변화하지 못한다. 상대적 안정은 상황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아무 효력을 낼 수 없다. 남을 미워하는 건 나쁜 일이다. 미움받아도 싼 사람을 미워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면 자기 자신이 바로 미움받아도 싼 그 사람은 아니라는 맹목적인 신념, 다른 말로 이기주의자로 사는 최악의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한다. ‘미움받을 용기’란 말이 왜 나왔겠는가? 우리가 미움을 받는다고 느낄 때 마음이 그걸 받아들이고 견디기가 힘들다. 기분이 더럽고, 자신의 가치가 형편없는 취급을 받게 됨을 직감한다. 이제 그 순간의 부정적인 감정상태를 떨쳐내고 스스로를 다독여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 정신력을 강화하는 나름의 수법이다. 그렇지만 정신력 강화가 현재로썬 최선의 방법이라는 데에 동의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고 본다. 결국은 서로를 미워하는 미움이 사라져야만 한다. 미움이 사라진 세상은 동화책 속에나 나올 이상 세계일까? 만약 그랬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을 미워하고 험담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그 자유로운 의지로 순종하길 바라신다. 강제로, 억지로 명령을 따르라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은 진정으로 주를 사랑하고 주께서 지으신 사람, 나의 이웃을 사랑해서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부모님의 매가 무서워서 말을 듣는 아이보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해서 부모를 위하고 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는 아이가 사랑스럽다.


  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미워하지 않을 용기’에 이르렀다. 받는 것은 객체이지만 하는 것은 주체이다. 나를 주체에 놓고 남을 미워하지 않아야 그 사람이 나로 인해 괴롭거나 슬프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미움받거나 오해를 받으면 기분이 언짢고 종일 그 생각에 몰두하고 스트레스받느라 정신 건강이 해를 받는다. 어른들이 아이를 혼낼 때 자주 하는 말이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역지사지 이론인데, 실은 인간이란 존재가 역지사지 불구자들이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남의 입장을 내 입장처럼 여길 위인이 못 된다. 공감도 지능이라는 말로 묘하게 사람의 약점을 노려 공감을 강요하는 말도 떠도는데, 막말로 이제까지 자기 입장을 넘어 남에게 공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못 봤다. 그런 거짓말로 사람들을 더 음흉한 거짓말쟁이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감을 못하면 나쁜 사람이라는 공식이 세워지면서 사람들 사이를 더욱 이간질하기 좋은 재료가 만들어졌을 따름이다. 내 생각엔 그렇다. 공감 못해도 나쁜 사람 아니다.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많을 수도 있다. 겪은 만큼만 알아도 충분하다. 남에게 덕성을 요구하고 강요하다 보면 오히려 관계성에 독이 된다. 사람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말고,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난 사람에게 기대가 없어.’라며 초월의 경지에라도 가있는 사람처럼 굴어서 어색한 사이를 만들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엄청나게 큰 사랑을 사람에게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보답하며 다른 사람의 작은 배려에도 깊이 감동할 줄 아는 자세가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는’ 진짜 모습에 가깝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동적으로 자신을 ‘받는’, 혹은 ‘당하는’ 처지에 놓고서 다른 사람 탓만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는 누구나 남을 미워하지 말아야 하고, 더 나아가 내 마음을 할퀴고 상처를 낸 상대마저도 사랑해야 한다. 정말 좋은 영화나 책을 보면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내게 아무런 유익이 없어도, 이득이 되지 않아도, 내게 항상 못되게 굴어도 그런 사람을 꾸준히 사랑해주면 그의 마음은 허물어지듯 열리고 만다. 사랑으로 열지 못할 문이 없다.


  선빵 필승의 법칙은 남을 불신하는 버릇이 내게 남긴 흉터이다. 저 자가 나를 미워하기 전에 내가 먼저 미워해야 심적 고통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못난 마음이다. 미움은 거의 불신에서 나온다. 또는 의심. 상대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아니면 나를 미워해서 곤란하게 만들 거라는 불신이 확신에 차면서부터 미움이 발동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죄에서 태어난 죄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은연중에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며 이기적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인간상이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재현될 수가 없다. 어딜 가나 똑같은 모양새로 발현되는 온갖 부정한 사건, 사고가 지난한 역사와 현재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이쯤이면 진리를 인정할 때도 된 것 같은데 그러질 않아 답답하다(물론 세상 끝 날까지 그런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내 못난 마음을 다시금 다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서 또 마음 아린 반성의 시간이 돌아왔다. 미움받는 건 용기가 없어도 필연적인 일이라 가능하지만 사랑하는 건 내가 하지 않으면 일어날 리 없는 역사이다. 내게 혼란과 우울함을 가져다준 여러 인물을 머리에 떠올리면 여러 복합적인 생각이 든다. 생각 말미에 그들의 일방적인 잘못으로 된 일은 없었고, 나의 어리석음도 한몫했다는 걸 수긍하며 이제는 그들을 그만 미워할 용기가 간절해진다. 그들의 그 어떤 흠과 허물이라도 내 마음 한쪽을 허물어서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싶다. 용서는 자만심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사랑만이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완성시킨다. 강설을 들으며 나는 쭉 고대하게 되었다. ‘미워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해.’하고 속으로 읊조리며 울음을 꿀꺽 삼켰다. 그런 힘이 없어 사람들을 밀어내는 재주만 발달했다.


  자괴감이 폭발했던 지난 야밤, 자기 객관화와 주제 파악이 안 되어 툭하면 헛물만 켜는 나 자신이 정말 밉고도 싫었다. 과대망상에 걸린 환자처럼 현실감각이 심하게 떨어져 섣부른 오해와 착각으로 내 발에 자꾸 걸려 넘어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나를 객관적으로 본다는 자체가 헷갈리는 여러 명제의 중심에 잘 서있어야 하는 고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볼륨을 조금만 높여도 자만해지고, 조금만 낮춰도 자기 비하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어쨌든 이런 내 마음에 공감할 사람들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그리 어려운 사상을 얘기하는 건 아니니.


  산란해진 나는 침대 끝에 앉아서 꽉 막힌 코를 풀었다. 동생이 누워 있다가 일어나 나를 안아주었다. 코도 막히고 고개가 높이 젖히자 숨이 막혔다. 그렇지만 그 한순간에 마음의 아픔이 완전히 소거되었다. 놀랍도록 단순하고 놀랍도록 가련한 그런 자들이었다, 사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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