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내게도 황금 같은 토요일이 온 적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 앞길에 길게 늘어선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해가 내리쬐는 여름날의 오후였고, 땀을 흘리지 않으려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거기에 도달했다. 오래지 않아 기다리던 버스가 정차해 문을 열어주었다.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수금 통에 집어넣고 기사 아저씨가 거슬러준 동전을 하복 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동복을 입고 있는 내내 여름이 오길 기다렸다. 우리 집이 이사를 하기 전에 옆집에 살던 언니가 물려준 교복은 내 몸에는 너무 헐렁했다. 그렇지만 교복이 좀 큰 게 우리에겐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내 나이가 17살이 되기까지 우리 부모님들이 새 옷을 사준 횟수를 꼽기에는 손가락 열 개는 너무 많았다. 언제나 같은 옷을 입는다는 것은 어쩌다 가끔씩 드는 가난에 대한 수치를 몇 번 견딜 만하다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입었던 옷을 입는 건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했다.
그랬지만 17살이 되면서 나는 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주눅 들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다. 난 엄마에게 요구했다. “그냥 블라우스 한 장에, 여름 치마 한 장일뿐이에요! 엄마, 제발!” 엄마는 내가 그런 요구를 할 때마다 강하고 냉정한 모습으로 대충 대꾸했었다. 하지만 그런 엄마도 늘 우리에게 미안해한다는 걸 난 알고 있었다. 못된 짓이긴 하지만 나는 그 점을 이용했고, 조금 더 머리를 써서 이번 부담이 그리 크지 않을 거라고 안심시키는 작전을 적용했다. 엄마는 내 요구를 들어주었다. 난생처음 내 몸에 꼭 맞는 교복을 새로 사 입을 수 있었고, 지금까지도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가 되었다.
여름이면 주변 사람들은 여름이 얼마나 싫은지, 여름이 어떻게 싫은지를 얘기하곤 했다. 여름에 음식이 얼마나 금방 상하는지, 여름에 빨래를 잘못하면 냄새가 나기도 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흘러나와 겨드랑이를 적시고 불쾌하게 만드는지, 그 모기며 파리, 온갖 무는 벌레, 소음, 모든 것을 끈적거리게 만드는, 녹아내리는 듯한, 불태우는 듯한 태양의 열기에서 피할 수 없다는 점 등이 수다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좋아하는 계절로는 겨울만을 지지했는지, 조금 지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이미 모두들 마음만큼은 어린 아가씨가 되어 있었던 거였다.
팔짱을 끼며 걷길 좋아하는 친구는 겨울이라고 특별히 예뻐 보이지도 않는데, 여름이면 거울 보는 것을 끔찍하게도 싫어했다.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을 들러야 안심을 했고, 스스로를 타박하고 꾸짖고 심지어는 혐오하면서 까지도 그 짓을 멈추지 않았다. 어떨 땐 자기를 자멸시키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애의 하얗고 오동통한 팔뚝이 얼마나 예쁜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낸 적은 없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나중엔 무척 질렸다. “넌 내 말을 안 듣고 있지? 이제 그만 할래, 그 얘기는. 너도 질릴 때가 되지 않았니?” 질릴 리가 없었다. 아직도 여름이었고, 친구는 남들이 자기를 흉보기 전에 스스로를 박살내고 망가트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 애를 말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 빼고는.
그렇지만 여름은 내게 축복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름이 얼마나 좋은 줄 아냐고. 그 역동적이고 활기찬 빛나는 하루, 생기 있는 사람들, 고동치는 심장, 붉은 태양, 높이 쏘아 올린 푸른 하늘, 눈부신 뭉게구름, 엷게 흐르는 부드러운 바람, 풀냄새, 풀벌레 소리, 그리고 까무잡잡한 소년.
매끄러운 시트는 열기로 뜨겁게 익어 솥뚜껑에 앉은 송아지의 엉덩이를 생각나게 했다. 정차 중인 버스 안은 한적했다. 토요일 오후였고, 산자락 밑 시골 마을까지 들어가는 이 버스를 타는 젊은 사람도 흔치 않았다. 나는 혼자 앉아서 속으로 유행가를 흥얼거렸다. 장시간 타고 갈 버스에서 지루할 것 같아 친구에게 mp3를 빌려볼까도 생각했지만, 친구가 전혀 내켜할 리 없을 테니 당연한 거절에 일부러 도전하지도 않았다. 그냥 지루함을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고, 바깥 날씨가 좋아 버스 창가에 앉아있으니 카페에 와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한 번도 카페에 가보진 않았지만 아마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카페에 간다면 커피보다는 오렌지주스를 시켜보는 것도 좋겠다. 버스에 뒤통수가 동그란 남자애가 올라탔다.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사되어 오렌지처럼 보였다. 남자애가 거스름 통에서 동전을 집는 걸 보고는 흘깃 눈을 들어 재빨리 얼굴을 보았다. 빨간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거기까지, 역광인 이쪽 자리에서는 눈이 부셔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계속 하던 노래를 마저 부르려고 더듬더듬 기억하려고 했지만 자리를 찾는 듯이 맨 뒷자리에 앉은 내 쪽으로 걸어오는 남자애가 신경 쓰여 무슨 노래였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남자애는 성큼 높은 의자가 있는 이쪽으로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애는 엉덩이를 풀썩, 내 옆자리에 앉았다. 혹시나 아는 애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았다. 남자애의 옆모습을 살짝 보았지만 전혀 내가 아는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입은 교복을 보아도 친한 사람이 없는 학교 학생이었다.
그 이후로 버스는 얼마나 빨리 그 먼 거리를 달려왔을까? 속으로 노래도 부르지 않았고, 카페에 온 것 같다는 감상에 빠져있지도 않았다. 겨우 너덧 명을 태우고 울퉁불퉁한 시멘트 길을 달리는 버스에서 맨 뒷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남자애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머릿속은 꼬불꼬불한 시골길보다 더 복잡하게 엉켜있었다. 아니면, 완전히 새하얬을 수도. 나는 고인 침을 삼키면서 그 시간을 놓쳐가고 있었다. 단지 집으로 가는 버스 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내 바람대로 되는 일은 없겠지만 이대로도 즐겁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정차 벨을 눌렀다. 그래서 버스는 정류장에 멈추었고, 남자애는 여전히 내 옆자리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사람들이 거의 다 내려갈 즈음, 남자애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버스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그 애는 버스를 떠나보냈고, 그 안에 앉아있던 나도 함께 보내주었다.
아마도 나는 이런 순간을 내내 기다려온 것 같다. 딱 이 정도가 내 선에서 아주 어울리고 기분 좋은 느낌 그대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나는 언니에게 아주 조금 허풍을 보태서 그 애가 굉장히 잘생겼었다고 자랑을 했고, 또 유도신문을 했다. 그런 애가 왜 하필 그 많은 자리를 놔두고 내 옆에 앉았을 것 같으냐고. 내가 17살이고, 우리 언니가 19살이긴 했지만 우리는 다 알고 있었다. 이 일이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것을, 아무 변화도 우리에게 가져다주지 않으리란 것을. 하지만 어쩔 땐 알면서도 속는 게 굉장히 재미있을 때가 있다. 대리만족을 위해서거나 제삼자를 속이기 위해서라면.
엄마는 내 블라우스가 너무 누렇다고 놀렸다. 씻는 게 별로 취미에 없는데다가 익숙한 그런 놀림을 받는 순간 엄마가 너무 미웠고 생각보다 큰 충격을 받았다. 다음 날 학교에서 보는 친구들의 블라우스가 내 눈을 눈부시게 밝혀줄지 나와 비교해도 별반 차이가 없을지를 하루 종일 비교하느라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나는 별반 차이가 없다고 결론을 지었고, 얼른 위로를 했다. 내게 냄새가 났었다면 그 남자애는 어떻게 내 옆에 앉으려고 했을까? 그럴 수는 없었다. 남자애들은 냄새나는 여자애들을 무척 싫어한다. 게다가 남자는 여자보다 후각이 발달해서 여자가 맡을 수 있는 냄새보다 더 미세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한다. 중학생 때 내 단짝 친구는 그 소문을 어디선가 듣고부터 생리를 하게 되면 옆자리에 앉은 남자 짝꿍이 냄새를 맡게 될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피곤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스물을 넘기고 중반이 되어서야 느끼는 게 남자애들은 생각보다 코가 예민하지 않았다. 그도 그렇고 생리 냄새가 어떤 냄새인지 모르는 남자가 더 많다고 해야 할까? 쇠 비린내가 진동하는 그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남자애들은 몰라도 여자인 나는 단번에 눈치를 챌 수 있다. 여름에는 그 냄새가 더 심하게 난다. 만약 날이 겹쳐서 한 공간에 있는 여러 명이 동시에 그 주기가 되기라도 하면 핏물 속에 빠진 듯 더욱 역하게 냄새가 나기도 한다.
내가 처음 생리를 시작했을 때, 자꾸만 배가 아파 속을 비우려고 화장실을 갈 때면 노란색 팬티에 검은 덩어리가 찐득하게 잔뜩 묻어있었다. 혹시나 나도 모르게 설사를 했나 싶어 몰래 팬티를 갈아입기를 수차례. 그럼에도 이 둔한 것은 그게 초경인 줄 모르고 다음날 그대로 학교에 갔다가 팬티만 시커멓게 더럽혔다. 이틀이 지난 후에야 그게 생리라는 것을 깨닫고 언니의 장롱을 뒤져 천으로 만든 생리대를 차기 시작했다. 별로 여성스럽지도 않은 머슴아 같은 성격에 생리 주기도 계산하지를 않아 셀 수 없이 실수를 하기도 많이 했다. 툭하면 새어 나오게 만들어 옷을 버리기도 하고, 때가 되었는데도 생리대를 차지 않아 이불을 망치기도 여러 번, 참 덤벙대고 태만한 성격은 생리할 때 더욱 빛을 발했다고나 할까?
생리는 남자애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생리를 할 때면 남자애들이 다가가기 무섭고 꺼려진다. 또 바깥으로 나도는 것이나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고 돌아다니는 것은 매번 각오가 필요해진다. 얇은 옷을 입는 여름엔 더 하다. 각오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화장실로 직행했다. 거울 앞에서 뒤돌아서서 엉덩이 부분을 살펴보며 생리대가 티나 보이지 않을까 싶어 노파심에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마치 연기자가 되는 것만 같다. 1년 내내 생리를 하지 않는 여자애. 아니면 단 한 번도 생리대를 차고 다니지 않는 여자애의 모습으로 보아주길 바라며 오늘도 안녕, 내일도 안녕한 하루를 만들었다. 남자애가 알아차리는 것은 끔찍했다. 왠지 몰라도 그렇다. 치부를 들켜버린 것처럼.
여름을 사랑한다.
왜냐면 새 교복은 하복뿐이라서
어쩌면 어설프고 단순하고 비쩍 마른나와 닮아서
아니면 낯선 소년과 버스 차창으로 비친 여름 정취를 만끽했던 기억 때문에
그때면 초록이 넘실거리고 하늘빛이 눈부시게 푸르러서
잊으면 사라질 존재를 가득 품고 있어서
무엇이든 이유를 갖다 대어서라도 사랑하고 싶은 여름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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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9년 전에 미완성한 산문이다.
청소년 소설을 습작하며 도움이 될까 싶어 기억에서 꺼내온 몇 가지 일화를 산문으로 남기고자 했는데 글이 길어져서 하루에 완성을 못하고 그대로 맥이 끊긴 글 중에 하나이다. 미완성인 이유는, 일필휘지하지 못하고 엉덩이를 떼게 되면 글에 녹인 정서가 잘 이어지지 않아 새 글을 쓰고 마는 불행한 글쓰기 습관 때문이다. 글은 기승전결을 모두 구상한 뒤에 앉은자리에서 단번에 쓰고 거의 수정 없이 놔두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