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색 Apr 15. 2021

바닷가에서

단조로움 일삼기

  빗방울이 천천히 떨어졌다. 아스팔트 바닥은 아직 물에 젖지 않아 회색인 부분이 더 많다. 길을 건너 걷고 있자니 비가 아까보다 조금 빨리 떨어지는 것 같았으나 이내 다시 드물게 내려온다. 빗방울에도 개의치 않고 해변에는 산책을 나온 사람들 몇몇이 모래사장 위를 거닐고 있다. 한밤중까지 이런 식으로 비가 온다고 했다. 그러다가 날이 바뀌면 일출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맑게 갤 것이다. 비는 얼마 내리지 않지만 구름은 하늘 가득 두툼하게 껴있어서 아직 서너 시 밖에 안 되었는데도 어둑어둑하다. 발이 푹푹 빠지는 통에 모래 위를 걷는 게 쉽지가 않다. 바로 코앞에는 하얀 거품이 양떼구름처럼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는 연푸른 빛을 띤 태평양 바다가 파도를 철썩이고 있다. 수평선 부근에는 갈매기가 연처럼 매달려 나는 배 한 척이 우에서 좌로 일직선을 그리며 지나간다.


  쓰고 있던 모자의 챙을 조금 올려 환하여진 앞을 내다본다. 바다 저편에 대해선 달리 관심이 가질 않는다. 이 주변에서 나와 같이 해안가를 오가는 무신경한 사람들을 두 안경알로 비춰볼 뿐이다. 검은 양복 위에 짙은 남색 레인코트를 걸친 저 남자는 무슨 일로 혼자 바닷가를 거니는 걸까? 꼿꼿이 바다를 바라보고 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주황색의 스포츠 의류를 입고 불뚝 나온 배를 내밀며 저 아줌마는 한참을 뭐만 쳐다보고 있는 걸까? 그리고 저 뒤 모래가 묻은 돌계단에 앉아서 연신 군것질을 하고 있는 중년부부는 뭘 하러 온 걸까? 이 지역 사람인 건지, 아니면 그저 여행을 온 건지?


  저들은 그러나 나와는 무관한 사람들, 무관한 생각에 빠진 낯선 사람들이다. 관심 이래 봤자 얼마 가지도 않는다. 그러니 저들은 나완 달리 혼자가 좋아서, 혼자이고 싶어서 혼자 나온 청승맞은 사람들이고 나는 아니다. 모처럼 기회가 생겨서 오게 된 여행인데, 나는 또다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이보다 더 즐겁게 보낼 색다른 뭔가가 필요한데, 이곳은 외딴 타지이고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성수기도 아닌데 호텔은 빈 객실이 드물어 보인다. 주말에 이 바닷가에서 열릴 세계 요트대회 때문일 것이다. 호텔 프런트 앞에 요트대회를 소개하려 세워둔 현수막 같은 것을 보아서 알고 있다. 게다가 전철로 몇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있는 다용도 전시장에서 국제학회도 열린다고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릴 때마다 요트선수로 보이는 외국인 여자들과 그들의 외국인 동료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이 내 뒤에서 뭐라고 대화를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지금이라도 쟤네들과 친구가 되어보는 건 어떨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술을 마실 줄 모르니까 함께 놀 수 없을 거라고, 내려야 할 층에 다다르면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먼 곳까지 여행을 왔는데도 이렇게 심심하고 따분하게 보내야 한다니 기분이 오히려 나빠지려 했다.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사랑은 언젠가 식기라도 하지. 하지만 외로움은 식을 줄을 몰라. 연인들의 사랑도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의 함정이었다면서 외로움은 그보다 더 복합적이고 비과학적인 감정인 거야? 차라리 외로움도 호르몬의 작용이었으면 사랑처럼 언젠가 식어지기라도 할 텐데’ 이런 생각으로 이 한가로움을 정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층 더 내부에서는 우르르 구름이 몰려온다.


  들고 나온 카메라로 연한 하늘색의 바다를 찍었다. 그리고 함께 오지 못한 가족들에게 보여줄 동영상을 촬영하다가 생각이 나서 카메라를 돌려 내 얼굴을 찍어본다. 무슨 표정을 지을까 생각을 하다가 귀찮아져서 다시 렌즈 안에 바닷가 풍경만 열심히 담는다. 동영상 촬영을 끝내고 확인을 해보니 내 표정이 우습다. 천둥번개 동반한 먹구름이 짓는 표정처럼 무뚝뚝하고 슬퍼 보인다. 이 스산한 날씨에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덜떨어진 여자애라니! 아무튼 더 이상 청승 부리는 것도 그만 싫증이 나서 돌아가기로 했다.


  여전히 빗방울이 떨어진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 더 빠른 속도로 내린다. 잔뜩 꾸미고 나온 십 대 남자애가 길 건너편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주춤주춤 제자리 걷기를 한다. 딱히 바빠 보이지도 않지만 아마 비가 갑자기 무진장 쏟아져 내릴까 걱정이 돼서 저러는 것 같다. 비를 피할 데가 마땅치 않은 지역이다. 주변엔 전부 호텔이나 온갖 숙박시설 건물뿐이다. 건물들을 죽 올려다보았다. 백 개는 쉬이 넘을 객실들과 그 방들을 빌렸을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한다. 그들이 어디서 왔을지, 누구와 왔을지, 무슨 일로 왔을지, 몇 살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지금쯤 다들 어디에 가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초록 신호등을 밝힌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건너편에 서있던 성급한 남자애는 빨간불일 때 이미 차도를 뛰어넘어가 제 갈 길로 가버리고 없다. 그 애 때문에 옆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던 동양인은–국적을 알 수 없는- 괜히 한 발을 뻗었다가 민망하게 제자리로 돌아가기도 했다.


  학회에 간 대학원생 언니는 저녁 늦게 돌아온다고 했지만 함께 여행 온 우리 멤버는 점심을 늦게 먹어서 그 언니가 돌아올 때까지 식사를 하지 않아도 괜찮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한동안 여유 넘치는 자유시간이 계속될 거라는 예보나 마찬가지이다. 여행을 오자마자 감기 기운을 보이는 남동생은 내내 침대에 누워 잠만 자고 있었다. 나는 모래가 잔뜩 묻은 발을 씻다가 마저 세수도 하고 팔뚝과 손도 씻고 로션까지 발랐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건너편에도 커다란 호텔이 떵떵거리며 조명을 환하게 켜 둔 모습이 부유함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층층마다 메이드 옷을 입은 여자들이 카트를 끌고 다닌다든가 목욕 타월 같은 것을 개는 모습이 이쪽에서도 들여다보였다. 이마저도 없었다면 내 눈길을 끌만한 흥미로운 볼거리는 단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카메라로 건너편 호텔을 찍어보기로 했다. 한참을 가만히 보고만 있자니 꽤 근사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그러다 다시 창가에 기대앉아서 디지털카메라를 최대한 멀리 팔을 뻗어 올려 나를 함께 찍기로 했다. 카메라 소리에 동생이 일어났고 나는 그 애에게 카메라를 건네면서 잘 좀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잠에서 깬 녀석은 별로 내키지가 않아 마지못해 하면서 몇 번 대충 찍어주고 말았다. 그러곤 퀭한 눈으로 학회에 간 누나는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때마침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우리의 이름을 불렀다. 찾는 동시에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비는 여전히 아까처럼 내리고 있었지만 가만히 방에서만 시간을 보내려니 인내의 방에라도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와 대학원생 언니, 남동생은 셋이서 바로 근처에 있는 유명한 지역 시장을 들러보기로 했다. 시장에 가는 길을 잠시 헷갈려 엉뚱한 길로 가기도 했지만 곧 시장 가는 길을 되찾았다. 가이드 역할을 자원했다가 동생은 농담처럼 나를 질타했다. 나는 이제 좀 사람 냄새가 나는구나, 안도를 했다. 시장을 구경하며 이런저런 먹거리 아이템을 고르고 샀지만 대부분 실패작이었다. 그러나 우리 입을 즐겁게 해 준 특별한 파전은 한 판을 더 사러 시장에 다시 들를 정도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결국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 아니었기에 나는 이 탁월하다는 단어를 찾아 ‘기억의 원시림’을 헤매었고 이미 이 여행을 통해 많은 돈을 지불했고, 지불할 언니를 위해서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여행보다도 학회 때문에 이곳에 온 언니는 바다 구경을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언니가 바닷가에 가보자고 제안했고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동생은 갑자기 많이 먹은 탓에 방으로 올라가 속을 비우고 오겠으니 로비에서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동생이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언니는 내일 우리가 묵을 다른 방을 찾아보려고 로비에 있는 손님용 컴퓨터 앞에 앉았다. 컴퓨터는 두 대가 나란히 있어서 나는 나머지 컴퓨터로 인터넷 뉴스를 보았다. 별로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고, 다만 더 이상은 심심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인터넷 뉴스 따위야말로 할 일 없을 때 집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을 만큼 보고도 남는 것이다. 이 짓을 여기까지 와서도 멈추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니, 그 생각만으로도 참을 수 없이 한심하단 생각이 든다. ‘난 언제나, 어디서나 인생이 참 글러먹었어. 보통 이 정도로 지루한 인생을 살려면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그래, 카멜레온이나 나무늘보하고 내기라도 해볼까? 내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지으면서 “슈퍼 레이지 스타 넘버 2입니다. 여러분, 2번을 부탁드려요. 제발, 눌러주세요! 제게 표를 주세요!” 이러고 있으면 TV를 보던 양반이 그러겠지. “안 그래도 네가 우승이야.” 결국 내가 몰표를 받게 될 걸.’


  누군가 내 의자 팔걸이에 살짝 손을 다. 따분해서 따분한 일들을 상상하던 중이었는데, 분명히 ‘익스큐즈미’라고 한 것을 들은 것 같았다. 돌아보니 구수한 인상을 풍기는 동양인 남자가 서툰 영어 발음으로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갑작스러워 머리가 원래 돌아가던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도는 것 같다. 대충 이해하고서 나는 ‘okay’ 아니면 ‘yes’만 연속해서 대답했다. ‘컴퓨터를 쓸 수 있을까요?’ 하고 정중하게 부탁하는데 거절할 리 있을쏘냐? 게다가 영어로 묻는 말에 내가 감히 거절을? 국수 면발 삼키듯이 빠르게 자리를 내주고, 옆에 있는 소파로 도망치다시피 자리를 옮겼다. 그는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고 대학원생 언니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에게 관심을 표했다. 내 예상대로 그는 중국인이었고 언니의 호의적인 관심에 역시 친근하게 반응했다. 소파에서 가만히 엿들어보니 언니가 이번에 참가한 학회에 그도 참가한 것 같았다. 그 외에 컴퓨터 사용방법이라든가 겉도는 대화를 몇 마디 나누는 것을 들었다.


  언니는 중국인 남자보다 일을 먼저 끝마쳤다. 우리가 묵을 곳은 시내에 자리한 ‘Inn’이라고 했다. 우리가 ‘그’를 두고 먼저 로비를 떠나게 된 것이 왠지 아쉬웠다. 내가 영어를 잘했으면 좋을 뻔했다고 생각했다. 우리를 향해 웃으며 몇 번인가 빤히 쳐다보는 남자를 보아 그도 나와 비슷한 마음인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고 곧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동생은 여전히 화장실에서 말을 달리고 있었다. 5분을 객실 앞 복도에서 벽면 유리에 전신의 내 모습을 비춰보며 기다렸다. 동생이 사투를 종결짓고 나서도 우리의 옆 방 객실에 들어간 언니를 또 대략 10분 정도 기다리게 되어서 우리는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아주 익숙하고 일상적인 듯이 모습을 취해보거나 발차기를 해보기도 했다. 예상보다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언니가 비로소 객실 복도로 나왔다.     


  해안선을 따라 걷는 일이 언제부터 낭만적이 되었는가는 알 수 없다. 언니와 남동생은 맨발로 야트막한 바닷가를 걸었다. 물론 둘은 후회했다. 바닷물이야 아주 차지 않고 발을 담글 만했겠지만 공기도 차고 모래바닥도 찼기 때문에 발이 시려서 견딜 수 없어했다. 아직 찬 날씨에도 발을 담가보려는 도전 정신은 높게 쳐줬다. 나는 귀찮음인지 뭔지를 모르겠는 권태로운 마음이 거의 기분을 점령하고 있어서 이도 저도 싱겁게 느껴졌다. 돈이 거의 한 푼도 없었고, 일정도 내 마음대로 조정이 가능하지 않았고, 무엇이든 허락을 맡아야 했으며 정해진 규칙이 잔뜩 있는 여행이라는 것에 마음이 조급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무려 부산에까지 와서 이런 소극적인 태도로 아무것도 즐겁지 않다는 무력한 태도는 함께 온 일행에게 얼마나 해로운 것일까? 화보 촬영을 온 연예인처럼 연신 사진이나 찍으며 갖가지 포즈와 표정을 잡아댔더니 미소도 동이 나고 있었다. 좀 더 열정적일 수 없냐고 채찍질해보았지만,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까? 나는 도저히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무엇을 하고 싶다거나 해야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게 남동생에게도 옮겨간 건지, 아님 녀석이 워낙 우유부단하고 결정력이 없는 탓인지 별로 제안하는 게 없기는 나와 마찬가지였다. 언니는 바빴고, 우리는 저녁에 먹은 파전 하나를 더 사서 방으로 돌아갔고 시원찮은 기분을 달래려 야식으로라도 해결하려 했던 나는 과식으로 인해 속이 더부룩해져서 사정은 더 나빠졌다. 언니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고 나와 남동생도 각자의 침대에 누워있다가 금방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출을 보자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하지도 않은 약속으로 모두가 한마음으로 늦잠을 잤다. 우리를 깨운 건 뜨거운 태양의 열기였다. 지난밤 커튼을 치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우리가 묵은 객실은 무엇보다도 채광이 끝내줬다. 직사광선은 아무 무리 없이 베란다 창을 뚫고 방을 달궜다. 처음에는 따뜻해서 잠자기가 더 좋더니 나중에는 개처럼 ‘헥헥’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날 정오까지는 방을 빼야 했기에 우리는 미국의 아침식사와 비슷한 메뉴의 뷔페식으로 조식을 해결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해운대를 한 번 더 거닐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