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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색 Apr 19. 2021

행복하지 않은 행복

과거를 골동품 취급하지 말 것

  혼란스럽다. 유행이 변한다는 건 사람들의 생각이 언젠가는 바뀐다는 뜻이다. 어제는 여럿이 먹는 식사가 즐거웠는데 오늘부터는 혼자만의 식사가 더 좋아진다. 유행은 확고하고 사람들의 ‘좋다’는 기준은 정확하다. 나도 옷이나 머리 모양, 화장법의 유행이 변하는 걸 알고 있고, 그때마다 정확한 기준으로 좋은지 싫은지가 결정된다. 그러나 유행에는 이유가 없다. 무조건 새롭고 신선하다고 해서 유행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 어제와는 다른 스타일임에도 다수의 사람이 좋아하게 된다. 여러 사람이 좋아하게 되는 데에 이유를 붙일 건더기가 없다. 그저 그것이 새로운 데다가 아름답고 예쁘고 멋지기 때문이다. 양말에 샌들을 신으면 촌스럽다고 했다가 어느 날은 양말과 샌들의 조합이 꽤 멋지게 어울리는 디자인이 탄생한다. 그런데도 거부감이 전혀 들지 않는다. 유행에 이유가 필수적인 건 아니다. 그렇지만 ‘행복론’에 있어서는 모호한 이유를 갖다 대면 ‘도대체 왜?’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행복에 대해서 논한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탐구하고 제시한다. 요즘의 '소확행' 추세는 내게는 좀 간지럽다. 물론 소소한 행복에 대해서는 오랜 세월 진부하게 떠들던 키워드이지만 요즘 말하는 소소한 행복은 상당히 감상적이란 느낌이다. 듣기 좋고, 보기 좋게 꾸민 장식적인 언어로 뭐든지 ‘행복’과 관련지어 버린다. 요즘의 행복은 디자이너들이 포토샵으로 잘 정제한 사진처럼 흠 없이 아름답고, 음악 프로듀서가 음원을 기계로 튜닝하듯 깨끗하고 완벽한 겉치레가 필수적이다. 내 얼굴, 내 모습이지만 내 모습이 아니고, 내 목소리이지만 내 목소리가 아니며, ‘행복’이지만 그런 행복은 세상에 없는 행복스럽다.


  이 와중에 나만이 요즘 주류의 ‘행복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이토록 얕디얕은 행복을 굳이 과대포장까지 해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힐링’이라는 둥 ‘치유’라는 둥 의미를 덧씌워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이다.


  요즘 애들은 고생을 모른다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요즘 사람들, 그런 말을 꺼내면 꼰대 취급하고 어리석게 보는 요즘 사람들, 쉽게 소비하고 소비를 위해 일상을 버티는 그런 사람들의 ‘행복론’이 가까운 친구의 입에서까지 나오면 소름이 돋는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것이 행복,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입고 싶은 것을 입고, 모든 내 취향이 존중받고, 내가 인생의 중심이며,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야 행복이라는 검소한 가치관이 여러모로 혈압을 상승시킨다. 이런 양심 없고 배타적인 행복론이 진정 아름답고 자기 가치를 높여준다고 믿는 것일까?


  실질적 문맹률이 높아가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숲을 보지 않고 나무를 보며 무섭도록 돌변하는 습성을 가졌다. 수많은 문장 속 단어의 조합과 의도를 보기보다 요즘 지지받지 못할 만한 의견 조각 하나를 발견하면 삽시간에 아수라장을 만든다. 다양성의 시대? 갈수록 획일화가 빨라지는 시대의 정점인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전 세대의 언어와 사고와 의견이 풍부하고 다양하며 어떤 개똥 같은 논리도 나름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 더 넓어진 선택의 폭? 선택사항이 많아진다고 해서 자유가 확대되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개개인의 사생활이 ‘존중’받을수록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멀어진다. 타인의 시선은 말 그대로 ‘타인의 시선’이다. 요즘 하는 말은 우리가 ‘타인의 시선’ 때문에 온전히 나의 선택을 존중받지 못하고 강압과 적정한 선 안에서 절제된 선택을 해야 했다고 한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건 잘못 퍼진 말이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게 잘못된 것처럼 전파되고 있는, 전제가 오류인 설이다. 타인을 신경 쓰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타인의 의견을 듣지 않고 철저히 나 혼자만으로 살아간다는 건 넌센스이다. 우리가 기존의 고정관념을 하나의 억제된 틀로만 보고 파괴하고 부정할수록 기존의 의미와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워지게 된다. 나중에는 보기 좋고 허울 좋게 꾸미기만 하면 그 내용이 얼마나 부실한지조차 신경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이 원래의 본질과 의미에서 붕 떠버려 제자리를 벗어난 요즘의 ‘행복론’과 가치관이 점점 더 낯설어지고 혼란스럽다. 낮아지는 출산율과 혼인율, 협소해지는 인간관계, 사라지는 우정의 의미, 사랑의 의미, 가족의 의미, 노동의 가치, 협력의 즐거움, 미움과 슬픔, 증오와 배신으로 복잡하게 얽히는 인생사는 먼 옛날의 유물이 되었다. 이순신을 존경하지만 남을 위한 희생은 바보짓이라고 말하는 사회, 유명 작가의 스테디셀러 소설을 밤새워 읽지만 혼밥이 좋은 사람들. 겪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사람과 관계와 사회를 등한시하는 ‘행복론.’ 거둘 것은 그저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과 자기만의 바운더리뿐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말하던 옛 조언이 그립다. 정직하게 살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하며, 남에게 져주라고 말하던 어른들, 내가 하나 덜 먹어도 남이 하나 더 먹으면 잘했다고 칭찬받던 때가 있었다. 그때라면 나는 좀 더 솔직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나는 ‘개성시대’의 막을 열던 때를 향유했다. 지금은 그게 훨씬 과해진 상태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나는 모든 말을 할 수 있고 어디에든 말할 수 있지만 잘못 걸렸다간 세상 밖으로 발도 못 디딜 처지가 될지도 모른다.


  나도 우리가 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생각의 틀에서 자유롭고 인간관계에서 자유롭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지금의 과도하게 치장한 ‘행복론’을 벗어던져야 할 것이다. 사람을 보는 눈이 다양해지려면 다양한 사람을 마주치고 겪어야 하며, 성숙해지려면 경험을 통해 반성과 자기고찰이 있어야 한다. 그런 과정이 없으면 어중이떠중이가 떠드는 말들로 내 이야기를 채우게 된다. 남이나 나나 다를 바 없는 이야기들로 말이다. 멋져 보이는 글과 그림, 사진과 음악으로 내 인생을 채우면 뭔가 좀 있어 보일지는 몰라도 무언지 헛헛한 일상은 무의미하게 흘러가 버릴 것이다. 의미 없는 행복만을 위하지 말고 의미 있는 인생의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러면 본래의 의미와 본질을 하나씩 찾게 될 것이다.


  이 붕 뜬 유령 같은 세상에 작게나마 보내는 진언이다.






18년도 9월에 쓴 글이다.

젊음이 증발할 때 패기도 같이 죽나 보다.

요즘은 따뜻하고 재미난 글을 쓰고 싶다.

이런 글은 나중에 읽으면 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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