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사랑이란 늘 신통찮은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어감이 감정 어딘가, 혹은 기억 어딘가를 콕콕 찌르는 것도 같지만 곰곰이 앉아서 과거의 과거를 헤집어 보아도 영 다른 모양새의 단어로 변모해버렸다. 매일 빈손으로 집에 돌아오신 아빠를 마중 나와서 허전하기도 한데 달리 기대하지 않았으면서도 괜스레 드는 실망감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더한 거리감이 들었다. 차라리 퇴근길에 과자 한 봉지 들고 돌아오는 아빠가 훨씬 가깝고 희망적이었다. 거리감이 이처럼 멀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가슴앓이를 곱절로 겪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실은 멋모르는 철부지라서 ‘사랑’이라는 장난감을 때 안 타게 고이 모셔만 두다 영영 잃어버렸을지도.
그러니까 한 번도 ‘사랑’ 그 자체에 대한 기대도, ‘사랑’의 대상인 누구에게도 그 마음을 이루어주길 바라는 기대란 걸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저 얼굴 한 번 보고, 말 한마디 건넬 때 얻는 소소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만족했다. 무려 이러한 기쁨과 즐거움을 말로는 소소하다고 표현할지라도 실제로는 당치 않을 소리였다. 그런 행운이 생길 때마다 나는 한밤중 얼핏 잠이 깨어 부스스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다 창밖에 떨어지는 유성우를 발견하는 것만 같은 희열을 느꼈다. 터져 나오는 탄성과 벅차오르는 행운의 기쁨이 내가 누린 사랑의 전체 줄거리였다.
그러다 더 많은 도파민의 분비를 요구하게 되었다. 요구하고 요구하다가 욕심을 내기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그 사람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얘기도 못하는 지경에 도달했다. 얼굴에서 조금이라도 본심이 드러날까 더욱더 수그러지는 고개와 어깨, 이 이상은 더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게 점점 고개를 쳐들고 우러러지는 그의 자태가 끝내 나의 이상과 소망은 여기까지라고 단념하게 만들었다. 그 사람은 너무 멋졌고 내가 대하기엔 ‘감히’ 황송해질 정도였다. 세상 끝 날까지 그는 내가 닿지 못할, 갖지 못할 보석이었다. 그 사람을 사랑하기에는 너무 흠이 많아서, 그 사람이 좋아하기에는 갖추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아서 그와 나는 죽을 때까지 ‘우리’로 묶이지 못할 거란 사실을 직감했고 통렬히 절감했고 쓰라림으로 체념했다.
늦겨울에서 초봄으로 넘어갈 즈음, 모브닝의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은 나를 눈물짓게 할 테니까’라는 노래를 우연히 들었다. 생소한 가수의 낯선 음색이 너무나 낯익은 것들을 노래하고 있었다. 한참을 반복해서 재생시키자 필름처럼 연달아 지난 장면들이 가까운 일부터 차례로 떠올라 스쳐 지나갔다. 그날 그가 입은 옷, 그가 건넨 말, 짓던 표정, 웃음소리, 장난스러운 농담, 마주치던 눈동자, 함께 걷던 길, 주고받은 문자, 같이 먹던 음식, 닿았던 손길, 어색했던 순간들, 분위기, 날씨, 계절의 냄새, 온갖 것들이 바로 지금처럼 너무나 생생하게 내게 돌아왔다.
왜 항상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게 될까, 하고 답답한 가슴속에서 읊조려도 보았다. 사랑해도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을 차라리 몰랐더라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살았더라면,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게 그도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라면, 하는 외로운 슬픔을 그가 알았더라면, 다른 이의 손을 잡는 그의 등 뒤에서 주저앉아 울고만 있었던 그날들이 이제는 그만 잊힌다면, 새 봄과 함께 마음에도 푸른 싹이 돋아날 텐데, 기억의 방향을 어디로 돌리든 날카롭게 베이는 가시덩굴뿐이었다.
그를 이제 사랑하고 싶지가 않았다. 당장 죽고만 싶었다. 용케 아무렇지 않은 척 수많은 위기를 넘겼다. 다른 이와의 행복을 바라 주었고, 지켜보았고, 내 마음속 진심을 철저히 외면해야 했다. 너무나 아픈 일이었고, 달리 무어라 표현할 말이 없는 너무나 아픈 일이었다.
시간은 내가 아는 어떤 놈보다도 무뚝뚝했다. 오롯이 제 갈 길을 가는 건 단 하나, 시간뿐이었다. 시간이 제 갈 길 가는 동안 나는 한참이나 뒤처져서 갈지자로 휘청대며 가까스로 발걸음을 떼었다. 그만 앞으로 가야지 하는 의무감과 자꾸만 뒤돌아 주춤거리는 미련이 서로 방어적으로, 서로 소극적으로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내가 바라는 것은 ‘마침내’라는 말 뒤에 나타날 테니 너무 조급해하지 않으려 마음먹었다. 이도 결국은 무뚝뚝한 시간이란 놈에게 길들고 물들어서 언제의 일이던가 할 날이 오고 말 것이며, 기어코 그렇게 될 거라고 숱한 과거로 훈수 두는 흔한 상처 중의 하나일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