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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색 May 21. 2021

위장에서 쉰내가 나네

  이상한 일이다. 이도 저도 내 마음이 아닌 것 같다. 답답한 속이 시원하게 풀리도록 하소연하고는 싶은데 하소연할 말이 내 말이 아닌 것 같아 입을 떼기가 어렵다.

  직장을 관둔 지 벌써 6개월이 지났다. 수입도 없이 모아둔 돈을 축내는 중이다. 사람마다 다르고 생각하기 나름일지도 모르지만 34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모아둔 돈도 적은데 그걸 또 축내고 있자니 마음만 급하다. 무슨 일이라도 얼른 구해지면 좋겠다는 조급증이 드는 한편 정작 어떤 일자리도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그저 구미가 당기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부대끼고 부담된다.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할 때만 해도 문학을 좋아한답시고 국문과를 전공했으니까 언젠가 작가가 되겠지 싶어 그전에는 학자금 대출이나 갚고 생계 이을 수단으로 언론사나 출판사에 취직해야지 하는 막연한 계획만이 있었다. 내 계획은 매번 이런 식으로 막연하다. 뭔가를 간절히 바라본 적이 없다. 어릴 때 참 좋아했던 교회 삼촌뻘 되는 분이 내가 책도 좋아하고 글도 제법 쓰니까 훗날 유명한 작가가 되기 전에 사인을 연습해두라고 농담 섞인 격려를 잘해주셨다. 우리 집은 인생의 목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토론을 하는 문화가 없고 진취적인 면도 없었다. 주어진 대로 사는 경향이 강했고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에 대한 섣부른 선입견이 상당히 확고했다. 진로를 깊이 고민할 여력도 없었는데 매일의 가정불화와 아빠의 폭력적이고 고압적인 학대를 피해 살 길을 찾는 것만이 최대 최선의 고민거리이자 이겨내고 넘어서야 할 고비였다. 매일이 고비였다. 엄마와 우리 사 남매는 자주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눴다. 아빠의 폭력성을 어떻게 컨트롤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견뎌내야 할까? 나는 엄마가 우릴 데리고 나가 아빠가 없는 곳에서 살게 해 주기만 몹시도 기다렸다. 34살인 지금까지도 말이다.

  내 유일한 특기가 정말 글쓰기였을지 모르겠다. 다른 특기를 키워볼 기회는 이제까지 없었다. 의지와 소망은 한 묶음인데 두 가지는 일찌감치 시들고 꺾여서 여전히 기획하고 추진하는 방면에 약하다. 대입시험을 치르고 등록금을 벌려고 공장 아르바이트를 다녔다. 주일과 수요일 저녁마다 예배 모임이 있어 가장 보편적인 시간대에 일할 수 있는 공장 말고는 거의 다닐 만한 데가 없었다. 시간 대비 급여가 높아야 했고 그만큼 고강도의 노동력을 들여야 했다. 공장 노동의 열악함은 벗어날 수 없는 한계점을 정확히 그어놓고 확인사살시켜주었다. 내 인생의 행로는 이미 테두리가 그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답답함을 느끼는 대신 그래, 알겠다고 건성으로 마음을 다독였다.

  우리 집은 최하층민이나 극빈층까지는 아니었다. 엄마나 아빠나 건강한 신체를 타고났고, 그 위의 부모님께 뭘 물려받을 것이 없을 뿐 얼마든지 두 분이 자립해서 평범한 서민 생활을 누릴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내 천성은 아빠에게서 온 것인데 아빠는 자존심이 세고 유독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했다. 자존심 빼면 시체라는 말이 정확히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수완도 좋지 않고 넉살도 없으면서 잘 되는 남은 어디라도 찾아서 흠을 내야 직성이 풀리고 나보다 더 못한 사람은 얼마나 못났기에 저리 절절매나 비하하는 데 매우 일가견이 있었다. 타고난 성향에 비해서는 나름대로 벌어보려고 애썼던 것도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아빠의 최선이었다. 아빠는 할아버지에게 아무런 유산을 물려받지 못했다. 여기서 유산이라 함은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에서 말하는 것과 동일한 종류의 것을 말한다. 할아버지는 고결한 가치관과 남다른 신념도 없이 오로지 자기 정욕을 채우는 데 급급한 인생을 살다 가셨다. 외간 여자를 애첩으로 두고 할머니의 인생을 통제하며 여자가 벌어오는 돈으로 궁핍한 생활을 함에도 멋을 부리고 나들이를 다니셨다. 아빠는 할머니의 가르침으로 그런 아버지에게도 반감을 일절 갖지 않고 그러느니 하고 따랐다고 한다. 

  저급한 인격도 유전이 되는 것인지 내 볼품없는 인성이 나이 들수록 더욱 선명하게 색이 짙어지고 있다. 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꼬인 시선으로 해석하는 데는 이골이 났다. 가히 천재적이었다. 금방 지었다 사라지는 표정과 눈빛도 지나치지 못하고 순식간에 의도를 갖다 붙였다. 대학시절 문학 창작 강의를 해주시던 선생님이 청소년 시기 자기혐오를 다 벗지 못한 나의 내면을 읽어내듯 짚어주신 적이 있다. 이후로 이제쯤이면 자기혐오를 벗었겠지? 하고 가늠하는 버릇이 생겼다. 오늘 같은 날도 마찬가지로 상태를 돌아보았으나, 아니, 하나도 벗지를 못했다. 청소년 시기에나 갖는 거라던 선생님 말씀 때문에 또 괜히 창피스럽다. 왜 아직도 벗지 못했니? 왜 아직도….

  나는 환경을 탓하기도 싫고 엄마나 아빠를 탓하기도 싫고 그 윗세대를 탓하기도 싫다. 오히려 무능한 현실보다 무능한 현실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는 게 훨씬 천박해 보여서 싫다. 어쨌든지 원인을 내게서 찾고 그 장애물을 뛰어넘고 싶다. 이번 장애물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 모르겠다. 타고난 천박한 인성과 애 진작에 탈락한 의지력이 오늘날 한 지점에서 만나 충돌하면서 나와 나 사이에 크나큰 괴리를 만들어냈다. 나는 나를 모르겠고, 나를 알고 싶지 않으면서, 안으로만 삭히고 묵혀온 갑갑증이 아무리 압축해도 목구멍까지 차올라서 질질 새어 나오려고 했다. 못난 나를 알고 싶지가 않다. 더 알아봤자 속상한 넋두리만 줄줄 읊어대고 해결책도 정답도 없는 궁한 말만 떠들 것이 뻔했다.

  일자리를 얼른 구해야 한다. 돈이 궁하니까 말이다. 지금의 생활 규모는 꽤 커서 수중에 있는 돈을 무의미하게 축내기만 할 것이다. 그럼 이곳을 떠나면 그만이다. 본가로 돌아가 전 직장에 재입사를 해서 무마할 수 있다. 문제는 아빠가 있는 본가에 돌아가기가 싫고, 복리후생이 엉터리인 데다 아무 낙이 없는 전 직장에 들어가기도 싫다. 전 직장에서 겪은 일들을 떠올리면 넌더리가 난다. 전 직장이 무지 나쁜 직장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나는 내가 싫고, 그래서 내가 만든 과거가 넌더리 나게 싫다. 같이 일하던 베트남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 사장님도 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자잘하게 부딪히는 사건이나 사람 속에서 유연하게 대처하고 아량을 갖지 못했던 내 모습이 미울 뿐이다. 거기 돌아가면 이전처럼 금방 속이 상하고 사람들이 미워지고 스트레스를 받다가 볼품없는 내 모습 때문에 마음이 또 약해질 것이다. 화려한 인생을 살기도 겁나지만 초라한 인생도 열등감을 자꾸 불러일으켜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뭐라도 해야 된다는 조급증만으로 요즘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소설 창작 수업을 신청했다. 나름 큰돈을 썼다. 한데 수강생들 대체로 글쓰기 수준이 그럭저럭 중간은 가는 편이었다. 그래서 내 수준이 달리 튀지도 않았다. 때문에 큰 재미를 못 느끼고 있다. 다시 또 확인사살당한 기분이 들었다. 넌 사실 글재주도 그저 그래. 그 정도는 널렸지. 다른 수강생들보다 돋보이는 대단한 글을 써내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추락한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모든 고민의 시작은 이 수업에서 비롯됐다. 무능하고 아무 짝에 쓸모없는 인간이 그나마 뭐라도 하려고 생전 하지 않던 소설 쓰기 수업에 발을 들였는데 여기서마저 그저 그런 인간이란 걸 확인받으니까 애초에 잘하는 게 있기는 한지, 그걸 확인하기엔 기회가 극히 적은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는 반추, 도태되어가기만 하는 매일의 일상과 그에 대비되는 재능 출중하고 자신감과 의욕을 펼치는 주변의 젊은이들이 안 그래도 잘게 부수어진 허망한 심사를 먼지같이 흩날리게 했다.

  이런 내게 응원하고 위로하는 말과 마음을 건네는 사람이 사실 적지 않다. 그들의 위로에 부응하지 못하고 깃털이 다 빠진 새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내 모습을, 눈물 웅덩이에 빠져 홀딱 젖은 꼴로 고맙다고 연신 인사하면서도 또 딴생각 중인 내 속내를 알까도 싶다. 위로를 받는 입장이라는 게 형편없어서 우습고, 측은하게 여기다가도 한편으론 자신감 없이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내게 진절머리 낼까 두렵다.

  얼마 전 시립단체에서 낸 채용공고에 서류가 붙어 면접을 보았다. 면접관 중 한 분은 떨어져도 좌절하지 말고 붙더라도 자만하지 말라는 마지막 말로 면접자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이튿날 합격자 공고에 ‘적격자 없음’으로 채용을 마무리했다. 벌써 몇 달째 적격자를 찾지 못한 공고였다. 입사가 간절한 직장은 아니었으나 졸지에 ‘부적격자’로 판가름 나니까 눈앞이 뿌연 연기로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불투명한 앞날은 기약 없이 연장되었다.

  내 마음, 내 생각, 내 기분, 무엇 하나 온전하지가 않다. 글만 가차 없이 길어지는데 무가치한 시간 낭비를 그만두고 과제로 낼 글이나 좀 끼적여야겠다. 어김없이 배가 고프니까 배부터 채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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