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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색 Jun 15. 2021

뒷걸음질

  어쩌면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내겐 한 번도 멀어진 적 없지만 말이지요. 그렇지만 오래도록 알고 싶었으나 끝내 알 수 없는 묘연한 미궁 속 이야기가 된 누군가의 마음입니다. 어쩌면 이미 다 밝혀진 마음일지도 모르겠네요.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진실이 다가오지 못하게 훼방놓고 쫓아내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싶은 미련한 타조가 여기 한 마리 있습니다. 머리를 구덩이에 처박고 시야에서 사라지면 나를 쫓던 무서운 진실이 더 이상 뒤꽁무니를 밟지 않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더 아둔해지고 나약해지고 있는 거죠. 정말로 내가 진실을 회피하고 있는 거라면, 그래서 문득 드는 생각이 실은 다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진짜 실체였었다면, 사실 그의 마음은 단 한 번도 내게 열린 적이 없었던 거라면, 시작된 적도 없지만 끝내지도 못한 관계를 여전히 끊어내지 못하고 마음의 공허를 다스리지 못할 뿐이라면, 동생은 그러더군요. 우리,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네. 그렇죠. 그와 돌이킬 수 없는 사이로 전락해버린 그날을 기점으로 매일 어제를 살고 있었습니다. 내일을 위하거나 내일을 준비하는 삶이 아니라 어제를 기리고 어제로 돌아가는 삶이었습니다. 내게 반쪽 문만 열어준 그가 야속하기만한 어제의 밤과 어제의 오후, 잠들기 힘든 새벽을 보냈습니다. 어느덧 여덟 달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계절이 바뀌고 온도와 날씨와 풍경과 환경이 바뀌었습니다. 거리처럼 시간도 우주의 빈 공간을 채운 암흑물질이 우리를 어느 자리에 흘려두었나 알지 못하여도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언젠가에서 언젠가로 멀어집니다. 수욕정이풍부지라 합니다. 이 말을 할 때면 때를 놓치는 것이 비단 효에만 있지 않아 어디에든 쓰고 싶었습니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유명한 일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카이로스를 얘기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도 이미 어디선가 들었을 제법 유명한 '기회의 신'이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그는 처음 듣는 사람처럼 반응했습니다. 그런 반응은 순진한 인상을 주기에 적절했고, 매너와 순진함으로 무장한 매력에 무자비하게 굴복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그와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재차, 삼차 시도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충분히 알만큼, 할만큼 했습니다. 대부분 인간관계에서 수동적으로 굴지만 삼 세 번은 나도 놀랄 만큼 의외의 행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세 번 다 실패로 끝났습니다. 세 번 다 인연의 끝을 받아들이기가, 어긋난 관계를 이해하기가 힘들어서 진실을 수용할 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처음엔 상황적 핑계를 이용했고, 다음엔 쓰레기 같은 인간의 저급한 소행으로 결론 지었고, 이번엔, 이번에도 상황이 핑계하기 좋았습니다. 현실적으로 인연을 맺기 영 어색한 관계로 알게 됐다는 점, 중간에 간교한 인간의 계략에 휘말렸다는 점, 그와 주변인의 판단력이 부족했다는 점, 내게도 큰 오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 등등 핑계 댈 거리가 꽤 많았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나를 모두가 걱정하기에 '이미 오래 전 이야기'라고 다 안다는듯이, 걱정 말라는듯이 헛배부른 소리를 해버립니다. 본능적으로 안심을 시킵니다. 늪에 빠진 것은 나인데, 꺼내주고자 할 뿐인데, 그럼에도 안심 시키는 건 내 몫입니다. 왜냐하면 난 여전히 그의 마음이 어디 있는가 궁금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이 나의 궤도에서 멀어지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사정권에서 이탈하여 영영 놓쳐버린, 서로 다른 우주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별이 아니길 애끓는 심정으로 간절히 원합니다. 그러나 내 이런 마음 덕분에 알고 맙니다. 그는 여기 없고, 다시는 내 궤도에 정차하지 않을 거란 사실, 내일 내가 죽어도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란 걸 부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쓰던 글은 미룬 채 밤만 축내고 있습니다. 한 꼬집만큼만이라도 번민이 기도에 녹아 사라지기를 바라며 하루 또 뒷걸음질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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