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요즘 유튜브에 빠져 산다. 유튜브를 보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보다 유튜브를 통해서 무엇을 보느냐 하는 고민이 더 친숙한 시대이다. 엄마도 유튜브를 여러 번 끊어 보려고 했지만 지난주 토요일 "엄마, 요즘 바쁜가 봐. 내가 카스에 글 올리는 것도 모르고 있지? 전혀 안 봤지?" 라고 물으니 "아휴! 요즘 너무 바빴어. 유튜브 보느라 바빴지, 뭘." 이라고 대답했다. 곧이어 유튜브에서 본 강연이나 남의 인생사 같은 것을 얘기해주었다. 엄마는 뭘 보아도 그냥 재미있다는 감상에 그치지 않고 교회에서 배운 하나님 말씀과 관련해서 드는 생각을 하며 끊임없이 생각의 정제 과정을 갖는다. 나는 엄마의 그런 면을 많이 물려 받았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진리인가? 진리에 근접한 생각(판단)이나 진리에 유사한 생각은 진리가 아니라는 굳건한 신념도 엄마와 닮았다.
사실 지금 글을 쓰려고 앉아서 그날 엄마가 해준 얘기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리려니 가물가물하여 잘 생각나지 않는다. 세상에는 뛰어나고 탁월한 사람이 많고 누구나 최고가 되고자 애쓴다는 얘기였을까? 작년 이후로 열등감이라는 감정이 전에 없이 뚜렷하게 내 속에 나타나면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열등감에서 벗어나고자 말씀도 보고 기도도 하고 감정에 못 이겨 눈물도 많이 흘렸다. 도돌이표 되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다. 그 자체로 만족하려고 노력할수록 그만큼 내 처지나 형편이 궁상맞다는 걸 더욱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눈을 꾹 감고 파도치며 심란하게 요동치는 마음을 잊어보려하면 오히려 태풍의 눈에 서게 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저 뒤에 조그맣게 서서 웃음 짓고 있는 엄마를 돌아보았다.
엄마는 어디 가서 자랑할만한 이력이 전혀 없었다. 시골 깡촌에서 자라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상경해서 이 일 조금, 저 일 조금하며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 보수적인 성 관념이 유난히 투철해서 이성교제도 거의 안 했고 아무런 사랑도 없이 그저 믿는 사람이라는 소개를 받아 교제 때부터 손찌검하던 아빠와 결혼했다. 아빠에게 동등한 사람 대접은 거의 받아 보지 못하고 폭력과 억압과 비난 속에 긴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엄마는 일찌감치 진정으로 주님을 구주로 믿었기에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억울해하지 않고 고난의 삶으로 알았다. 그래서 우리 네 남매는 엄마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엄마가 평생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한 조건을 단 하나도 누린 것이 없음에도 엄마는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옷 한 벌도 제대로 사주지 못했고 용돈은커녕 물질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했지만 엄마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엄마는 우리를 말씀으로 부단히 가르쳤고 매로 쳤고 기도해주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데로 가기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한 번도 우리를 엄마의 분신처럼 생각하지 않았고 우리를 독립된 인격체로 알았다. 한 번은 엄마에게 물었다. 만약 엄마가 죽는 날 우리 모두 엄마의 임종을 지키는 행운이 주어진다면 엄마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은지, 엄마는 누운 채로 조금 생각에 잠기며 "너희를 만나서 반가웠고 너희와 함께 해서 참 즐겁고 행복했다고, 하늘 나라에서 볼 때를 기다리겠다고 해야지. 정말로 나는 너희를 내 배로 낳았다고 해도 그걸 통했을 뿐이지 만난 거라고 생각해. 하나님께서 너희라는 사람을 만나게 해주신 거야."
물론 엄마는 말과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만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든지 영향을 준다든지 했던 게 아니었다. 오히려 엄마는 그 어떤 말로도 엄마의 행위를 일절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부지런히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밥을 해주고,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모든 일에 자처하면서, 우리에게는 꽤 많은 자유를 주었다. 엄마의 경건생활의 기준에 비하자면 우리는 상당히 자유롭게 생활했다. 나는 그래서 엄마가 드는 매에 반기를 든다거나 부당하다고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엄마가 날 매로 칠수록 나는 엄마 품에 파고들었다. 그 매는 진리였고 정당했고 물질을 채워주는 것 이상으로 더 하기 힘든 사랑이었다.
가끔 어떤 친구들이 지나가는 말로 자기는 엄마처럼은 안 살 거라고 다짐하듯, 자기 엄마의 인생을 그저 비참하고 비루한 것으로 취급하는 소리를 하는 걸 들었다. 나는 그 반대라서 동의하기 힘들었다. 엄마와 같이 살기에 나는 너무 부족하고 빈약했다. 내 신앙은 겉껍데기뿐이었다. 엄마 같은 인생의 반의 반도 못 살아낼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저 유물론자이고 그걸 초월한 마음을 못 가져서 불행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벌써 한 10년 정도 청소일을 하신다. 남의 가정집에 가서 약속한 몇 시간 동안 청소를 해주는 일인데 어느 집에를 가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그 집에서 요구하는 청결보다 훨씬 더 많이 일을 해주고 와서 한 번 연이 닿으면 엄마만 찾는 집이 많다. 엄마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일을 한다는 것, 그 일이 몸을 너무 혹사시키는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대우를 받을까 하는 등의 협소한 염려 때문에 엄마에게 종종 그 일을 그만하라고 하거나 조금만 하라고 하며 돈을 벌 때는 드릴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용돈도 많이 드려봤는데 엄마는 그런 말을 말라고만 했다. 엄마는 이 일에서 얻는 성취가 크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시간에 매이지 않아 교회에 일손이 필요할 때면 얼마든지 나설 수 있어서 좋은 점이 많다고 했다.
나는 열등감의 굴레에 처박혀서 엄마가 해준 말들을 떠올리고 엄마가 살아가는 모습을, 그 마음가짐을 자꾸만 떠올렸다. 엄마는 내게 백석의 갈매나무와 같은 역할이 되어주었다. 사실은 엄마 말이 다 맞다는 걸 인정하면서 점차 괴롭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제는 많이 좋아졌다.
최고만이 되기를 원하는 경쟁시대를 논하다 말고 난 또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내가 최고가 안 되어도 괜찮지?" 엄마가 엄지를 세워 들이댔다. "지금이 최고야!" 그러곤 고등학교 2학년 때 미술학원에 보내달라 간곡하게 요청했던 일을 여전히 떠올리며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형편이 안 돼서 못 보내줬지, 보내주고 싶었다며 말했다. 엄마 마음이야 이미 그때도 알고 있었다. "엄마, 그때 나 미술학원 보내줬어도 얼마 못 버티고 관뒀을 거야. 인내심이 없어서." 내 말에 엄마가 흐 웃었다. 때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슬픔이 찾아올지라도 엄마의 삶과 존재가 내게 위로를 준다. 엄마라는 위로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