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피노 리피의 「성모와 아기 예수, 성 제롬과 성 도미니크와 함께」
빛과 그림 속에서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자리한 내셔널 갤러리.
도심의 분주한 발걸음 속에서도,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몇 세기를 뛰어넘어 유럽 미술사의 한가운데 서게 된다.
무려 2,600점의 작품이
국민의 소유라는 이유 하나로 무료로 공개된다니,
그 자체가 경이롭다.
많은 이들이 시간이 없으면
모네, 세잔, 고흐, 고갱의 방만 스쳐 간다.
하지만 나에겐 미술관의 기쁨이
꼭 유명 화가의 이름표에만 있지 않다.
그림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그 그림을 마주한 내 마음의 자리가
내게 더 오래 남는다.
결국 그림은 이름이 아니라,
이야기로 내 안에 남는다.
기도실에서 바라봐야 했던 그림
내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작품이 있다.
15세기 화가 필리피노 리피 (Filippino Lippi)의
「성모와 아기 예수, 성 제롬과 성 도미니크와 함께」 다.
한때 이 그림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실패한 작품’처럼 불리곤 했다.
배경의 언덕은 부자연스럽게 튀어나와 보였고,
무릎을 꿇은 두 성인의 자세는 어딘가 불편하게 보였다.
“원근법이 무너졌다”는 말도 이어졌다.
그러나 젊은 평론가 로버트 쿠밍(Robert Cumming)은
전혀 다른 시선을 내놓았다.
이 작품은 원래 미술관의 벽에 걸리기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니었다.
기도실 한쪽에 걸려,
무릎을 꿇은 이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도록
설계된 그림이었다.
쿠밍은 갤러리 한복판,
수많은 시선을 뒤로하고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과장되던 언덕은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었고,
성인들의 어색한 자세는
깊은 경외로 다가왔다.
그림은 그대로였고,
달라진 건 내가 서 있던 자리였다.
관점이 달라지면
이 이야기는 그림만이 아니라
삶에도 겹쳐진다.
나는 종종 문제의 원인을
대상이나 상황 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런데 어쩌면, 시선이 기울어져 있던 건
나였을지도 모른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우리의 뇌.
친구와 카페에 앉아 있어도,
커피 향, 웃음소리, 창가의 햇살 중
단 몇 가지만 붙잡는다.
그려면서도 “난 똑똑히 봤어”,
“다 들었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더 나아가 “나는 그 사람을 다 알아”라는 말도
대개 착각에 가깝다.
짧은 대화, 몇 번의 만남만으로
한 사람을 단정 지어 버리곤 하니까.
그래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건
내 관점이 얼마나 겸손 한가인지 모른다.
겸손은 공감으로
쿠밍이 무릎을 꿇고 그림을 올려다본 것처럼,
사람을 이해하는 길도
시선을 낮추는 데서 시작되는 것 같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
이 작은 고백이
공감의 문을 열어준다.
그럴 때야 비로소
“괜찮아요”라는 말 뒤에 숨어 있던
“사실은 힘들어요”라는 진심이 들려온다.
겸손이 공감으로 이어지고,
공감은 조금씩 우리를
진실 가까이 데려간다.
에필로그 : 시선이 낮아질 때
필리피노 리피의 그림은
한때 실패작으로 불렸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자
모든 비례는 아름답게 맞춰졌다.
틀린 것은 그림이 아니었다.
그림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달라진 건, 내가 서 있던 자리였다.
사람도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겸손히 시선을 낮출 때,
상대의 진심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
무릎을 꿇을 때,
시선을 낮출 때,
비로소 깊은 빛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