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카이로의 뒤편에서 살아가는 70,000명의 사람들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나는 나의 중심을 다시 묻는다.
남들이 보지 못한 자리에 선 순간, 비로소 내가 무엇을 보고 외면해 왔는지가 선명해졌다.
카이로 외곽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
운전기사가 잠시 속도를 늦추더니
자신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내게 보여주었다.
햇빛에 그을린 피부 위에 작은 십자가 문신이 선명했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이 표시를 새겨요.”
콥트교도는 태어난 순간부터
신앙을 포기할 수 없다는 약속을 몸에 새긴다고 했다.
그 문장을 듣는 순간,
신앙이라는 것이 ‘의지’나 ‘선택’을 넘어
하나의 운명으로 새겨진 삶도 있다는 사실이
가슴 안쪽에서 천천히 무게를 만들었다.
카이로 중심부를 지나자
도시는 서서히 낮아지고, 느려지고, 벗겨지기 시작했다.
건물 외벽은 낡은 페인트를 벗어내며
삶의 가장자리만 남긴 듯 거칠어 보였다.
차창에 비치던 시선의 높이가 달라졌다.
몸이 먼저 알아챘다.
‘도시’의 결이 아니라 ‘주변부’의 결로 들어셨다는 걸
곧이어 공기가 변했다.
부유하는 먼지가 눈에 보일 만큼 짙어지고,
뜨거운 숨결 같은 열기가 천천히 얼굴을 밀어냈다.
그 뒤로
햇빛에 오래 구워진 비닐과 플라스틱 냄새가
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목 깊숙한 곳까지 냄새가 들어오며
나는 잠시 숨을 고르는 내 몸을 감지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그 냄새 속에서도 각자의 일을 잇고 있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나를 더 조용하게 만들었다.
작은 언덕처럼 쌓인 쓰레기, 그 사이의 사람들
차가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자
모카탐의 풍경이 눈앞에 또렷이 들어왔다.
쓰레기 더미가 길 양옆으로 작은 언덕처럼 쌓여 있었고,
비닐과 종이, 녹슨 금속 조각들이 햇빛을 받아
묘하게 반짝거렸다.
사람들은 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서있었고
손에는 분류해야 할 쓰레기 조각들이 들려 있었다.
한 남자는 봉지를 뜯으며
안의 물건을 종류별로 나누고 있었고,
옆에서는 누군가가 담담한 얼굴로 빵을 씹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 모든 틈을 가볍게 뛰어다녔다.
작은 발아래서 비닐이 바스락거리며
얇고 건조한 울림을 내는 듯했다.
먼지가 발목 주변에서 기둥처럼 피어올랐다가
햇빛에 부서져 금빛 입자처럼 흩어졌다.
나는 그 장면 앞에서
숨이 아주 조금 늦게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몸이 미세하게 뒤로 물러나는 듯한 감각—
티 나지 않지만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한 움직임.
그 순간
나는 냄새나 먼지보다
그 불편함을 의식하고 있는 나의 마음을 더 강하게 보게 되었다.
이 냄새가 힘들다”는 감각보다,
“나는 왜 이 장면 앞에서 숨을 고르게 되는가?”
그 질문이 가슴 안쪽을 천천히 울렸다.
그들은 이 공기 속에서
자신들의 하루를 만들어가고 있었는데
나는 그 하루의 결을 보기보다
먼저 냄새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간극이
오히려 나를 흔들었다.
자발린 —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70년
사람들은 이곳을 흔히 ‘쓰레기 마을’이라 부르지만
그 이름만으로는 이들의 삶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
자발린(Zabbaleen) —
아랍어로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
1940~60년대,
농촌에서 밀려난 가난한 콥트 기독교인들이
카이로로 흘러들어와
도시의 쓰레기를 수거하며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그들을 공식 시스템 밖으로 밀어냈고,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은 도시 전체 쓰레기의 90% 이상을
손으로 직접 분류하며 살아야 했다.
더럽고 위험한 일.
사회가 외면하는 계층.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재활용 시스템을 만들었고,
가족 단위로 일을 가르쳤고,
더럽고 무서운 노동을
생존의 기술로 바꾸어냈다.
그들의 손끝에는
묵직하지만 단단한 힘이 묻어 있었다.
아이의 미소 — 흔들리는 마음
차가 골목의 돌부리에 걸리며 멈추자
한 아이가 두 번 털어낸 먼지 사이로
내게 환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 손짓은
골목의 냄새와 소리와 뜨거움을
순간적으로 멈춰 세웠다.
그 아이의 눈빛 앞에서
내 안 어딘가에서 아주 조용한 떨림이 일었다.
심장이 한 박자 뒤로 밀린 듯한 감각—
그러나 외면할 수 없이 가까워지는 움직임.
‘나는 왜 이 장면 앞에서 멈춰 섰을까?’
아름다운 론다에서는
죽음을 품은 다리를 보며 흔들렸고,
모카탐에서는
삶이 쓰레기를 품고 이어지는 장면 앞에서 흔들렸다.
둘은 극단적으로 다른 풍경이었지만
내 안에서는 묘하게 같은 질문을 남겼다.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단단하고,
또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을까?”
절벽 아래의 교회 — 사람의 입체성
골목을 지나 절벽 아래로 내려가자
모카탐의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바위를 그대로 깎아 만든 콥트교 교회.
천 명 이상이 모여 예배할 수 있는 공간.
바위벽에 새겨진 성경 장면들.
쓰레기 마을 바로 아래에 숨어 있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성지.
그곳에서 나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입체성을 보았다.
쓰레기 속에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아이들은 웃고,
어른들은 손끝으로 생존을 지탱하고,
절벽 아래에는 믿음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그들은 나와 다르게 살아왔지만
어딘가 닮아 있었다.
어떤 어둠을 지나고
어떤 빛을 붙잡으며
오늘을 버티는 존재라는 점에서.
떠나온 뒤에도 남은 질문들
카이로를 떠난 뒤에도
모카탐의 잔상은 오래 남았다.
전쟁 뉴스 속 아이들의 얼굴,
기아로 쓰러진 사람들,
도시의 그늘로 밀려난 이웃들까지.
세계의 모습들이
모카탐의 공기처럼 문득 스쳐 지나갔다.
나는 무엇을 보고 살아왔을까.
무엇을 외면해 왔을까.
그리고 내가 누리는 안전은
누군가의 위험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니었을까.
정답은 없다.
그래서인지 모카탐은
여전히 내 마음 한편에서
‘끝나지 않은 문장’.처럼 남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의 사람들은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은
쓰레기 산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하루를 만들어가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길 위에서 만난 너는
오늘도 나를 다시 쓰고 있다.
나를 죄책감에 빠뜨린 것이 아니라
세계가 얼마나 층층이 이어져 있는지를
조용히 보여주었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의 얼굴로 설명되지 않는다.
세계는 단순하지 않다.
그 사실을
모카탐이,
아이의 미소가,
절벽 아래 교회의 숨결이
조용히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너를 통해 나를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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