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의 습기 속에서 배운 '거절의 기술'
이야기는 오래전, 잠시 선교로 갔던 태국 방콕에서 시작된다.
방콕 외곽, 국제학교 근처의 원룸 오피스텔 1층. 내 방 창문에는 쇠창살이 덧대어져 있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을까 봐 나는 늘 두꺼운 커튼을 쳐두었다. 커튼을 닫은 실내는 언제나 어두웠고, 에어컨 바람은 유난히 차가웠다. 마치 “괜찮냐”라고 묻지도 않고 내 쪽으로만 쏟아지는 일방적인 바람처럼.
가끔 답답함을 못 이겨 창문을 열면, 바깥의 공기가 얇게 스며들었다. 그것은 환기가 아니었다. 축축하고 뜨거운 습격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걸 ‘숨구멍’이라 불렀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이상해서, 질식할 것 같다가도 바늘구멍만 한 바람만 들어오면 또 살 것처럼 구는 데가 있었다.
런던에서 챙겨 온 ‘단정한 원피스’들은 방콕의 더위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안감이 있는 옷들은 땀에 젖어 온몸을 휘감았다. 보호해 주기는커녕 움직일 때마다 나를 더 단단히 옥죄는 갑옷. 결국 나는 시장에서 얇고 펄렁이는 원피스를 두세 벌 샀다. ‘살을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가장 얇은 것.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가장 가벼운 것. 나는 그 헐렁한 옷을 입고, 매일 아스팔트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사이를 걸어 출근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목구멍에 달라붙었다. 몸은 아직 학교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영혼은 이미 하루치 피로를 선납한 사람처럼 무거웠다.
매일 아침, 나는 참새 방앗간처럼 세븐일레븐(7-Eleven)에 들렀다. 문이 열리면 냉기가 훅 끼쳐 왔다. 밖에서는 땀이 흐르는데 안에서는 닭살이 돋는 기묘한 온도 차. “카푸치노 주세요.” 아직 태국어가 서툰 내 주문은 늘 조금 늦었고, 직원은 내 말을 대충 알아들었다. 그는 설탕을 넣을지 말지 묻지도 않고, 으레 그렇다는 듯 연유와 설탕이 듬뿍 들어간 커피를 내어줬다. 나는 컵을 받아 들며 직원의 무심한 표정을 살폈다. ‘바빠요. 뒤에 줄 서 있는 거 안 보여요?’ 그가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말을 내가 먼저 읽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괜찮아요(Mai pen rai).”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내 표정은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 모금 마신 커피는 머리가 띵할 정도로 달았다. 나는 그 끈적한 단맛이 나를 살리는 건지, 서서히 죽이는 건지 헷갈린 채로 빨대를 물었다.
학교 교무실은 유일하게 와이파이가 빵빵 터지는 곳이었다. ‘연결’이 특권이 되는 공간. 문을 열고 들어서면 형광등의 하얀빛이 나를 덮었다. 곧바로 회의가 시작됐다. 태국 현지 빈민촌 아이들을 초대하는 대형 행사를 앞두고 있었다. 300명이 넘는 아이들이 몰려오는 큰 잔치였다. 하지만 준비는 더뎠고, 핵심 자료인 ‘워크북’은 아직 담당자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교장이 물었다. “누가 자원해서 워크북 담당해 주실 분 계실까요?” 질문은 공기 중에 멈췄다. 나는 그 짧은 정적이 무서웠다. 질문이 공중에 떠 있으면 누군가는 그걸 잡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바닥에 떨어져 와장창 깨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불행히도, 깨진 유리 조각을 줍는 건 늘 내 몫이었다.
“한나 선생님이 하면 어떨까요?” 누군가의 추천. 그것은 제안이 아니라, 이미 내 책상 위에 짐을 올려놓고 ‘사인만 하세요’라고 내미는 통보였다.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그 한마디는 빠르고 정확했다. 누군가 서운해할 틈도, 회의 분위기가 어색해질 틈도 주지 않는 마법의 문장. 하지만 그 대가로 내 퇴근 시간은 사라졌다. 나의 저녁, 나의 허리, 나의 손목, 그리고 내 방의 고요한 공기까지. 모든 것이 그 ‘괜찮아요’라는 말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조이(Joy)가 다가왔다. 그녀는 이 학교에서 오래 일한 베테랑 교사였다. 머리카락에서 샴푸 향 대신 비누 향이 나는, 단단하고 꼿꼿한 사람. 조이는 내 노트북 화면에 띄워진 워크북 파일을 보더니, 대뜸 물었다. “어제 그거… 네가 맡았지?” “응. 하기로 했어.” 나는 습관처럼 웃었다. 조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탄식이라기보다 ‘계산이 틀렸다’고 말하는 수학자의 숨소리 같았다.
그때 교장이 들어왔다. 그는 어제와 똑같은 톤으로 말했다. “워크북은 잘 되고 있죠? 그럼 게임 진행이랑 구디백(선물 꾸러미) 포장은 누가 하죠? 오늘 오후에 인력이 좀 필요한데.” 그 말들은 작은 돌멩이처럼 던져졌고, 내 앞에는 그것을 받을 두 손이 이미 준비돼 있었다. 내 입술이 무의식적으로 달싹거렸다. “아… 제가…”
“그건 전 못 해요.” 조이였다. 그녀가 내 말을 툭 끊고 들어왔다. 순간, 교무실의 시간이 멈췄다. 사과 없이, 변명 없이, 단호하게 뱉어진 거절. 교장이 당황한 눈으로 조이를 쳐다봤다. 조이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오늘 3시부터 제 수업 자료 준비해야 해요. 방과 후 상담도 잡혀 있고요. 제가 그것까지 맡으면, 제 수업이 무너져요.”
그녀의 문장에는 ‘죄송해요’가 없었다. 대신 **‘내 시간의 경계’**가 있었다. 교장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다른 분…”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지도, 교장이 화를 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업무는 누군가에게로 자연스럽게 분산되었다.
나는 멍하니 조이를 바라봤다. 조이는 커피 잔을 들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아주 낮게,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If you do everything, you disappear.” (네가 모든 걸 다 하면, 결국 네가 사라져.)
그 말은 충고가 아니라 통역이었다. 내가 남발하던 “괜찮아요”라는 말이, 실은 나 자신을 지우개처럼 지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웃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떨렸다. “근데… 내가 안 하면… 누가 해?” 조이는 종이 한 장을 내 앞에 툭 놓으며 말했다. “일은 늘 있어. 하지만 네 몸은 하나야.”
그 순간, 닫혀 있던 내 마음의 창문이 덜컹거렸다. 조이의 말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내가 ‘배려’라고 믿으며 모든 짐을 떠안았던 방식이, 실은 나 자신에 대한 가장 차가운 학대였음을 깨달았다. 나는 다시 노트북 화면을 봤다. 워크북의 빈칸이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 빈칸은 ‘내가 채워야 할 의무’였는데, 오늘은 ‘내가 숨 쉴 공간’처럼 보였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그럼… 구디백은 다른 분이 맡아주셔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워크북까지만 할게요.” 말을 뱉자마자 혀끝에서 “죄송해요”가 튀어나오려 했다. 하지만 옆에서 조이가 눈빛으로 나를 막았다. ‘사과하지 마.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그 사과를 꿀꺽 삼켰다. 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합시다.”끝이었다. 그렇게 간단했다.
퇴근길, 나는 다시 편의점에 들렀다. 자동문이 열리고 서늘한 바람이 땀에 젖은 목덜미를 식혀주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설탕은 빼고요” 처음으로 내 입으로 ‘빼달라’고 말했다. 빨대를 꽂아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혀끝에 닿는 쓴맛이 묘하게 선명했다. 더 이상 달콤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차갑고 깨끗했다. 유리창 밖으로 오토바이 무리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쓴 커피를 단단히 쥐고, 그 풍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이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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