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변호인이 되어 주기로 했다

타인의 위로를 기다리지 않는 법

by 양수경


방콕의 오후 3시는 시간이 끈적하게 달라붙는 구간이다. 수직으로 내리 꽂히는 태양 아래서 아스팔트는 유령처럼 흐물거렸고, 강당 안은 300명의 아이들이 내뿜는 땀 냄새와 웅웅 거리는 마이크 소음으로 포화 상태였다. 낡은 에어컨은 비명을 지르며 공기를 휘저었지만, 습기는 오히려 피부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간식 상자를 나르고 있었다. 사역이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 내 몸은 이미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어, 선생님! 그거 아니에요! 옆 반 상자예요!”


동료 교사의 다급한 외침이 날카롭게 공기를 갈랐다. 고작 상자 하나를 잘못 든 것뿐이었다.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면 그만인 사소한 엇박자. 하지만 그 순간, 내 안의 ‘내부 검열관’은 기다렸다는 듯 마이크를 잡고 유죄를 선고했다.


'이 나이 먹도록 이것 하나 못 챙겨? 다들 예민한 거 안 보여'


검열관의 비난은 강당의 소음보다 더 크게 귓속을 때렸다. 홧홧한 열기가 얼굴 위로 번졌다. 그것은 더위 때문이 아니라, 30여 명의 동료 사역자들 앞에서 노출된 나의 ‘무능함’이 주는 날 선 수치심이었다. 나는 “죄송해요”를 연발하며 허둥지둥 상자를 옮겼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차갑게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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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숨을 돌리려 강당 구석, 페인트가 벗겨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저만치 앞에서 땀범벅이 된 채 아이들을 진두지휘하는 팀 리더 J가 보였다. 늘 “우리는 한 팀”이라며 격려하던 그였기에, 그날따라 나는 그가 잠시라도 내 쪽을 봐주길 바랐다. 눈이 마주치면 내 속상함을 읽어주길 기대했다. ‘아까 실수해서 너무 부끄러워요. 저 좀 위로해 주세요.’


마침내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그의 손짓은 내 기대와 달랐다. 그는 물을 가져다 달라는 짧은 신호를 보내고는 다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지쳐 있었고, 목이 말랐으며, 다음 순서를 진행해야 했다. 그에게 나는 위로가 필요한 영혼이 아니라, 물을 건네줄 사역의 ‘기능’ 일뿐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현장은 전쟁터 같았으니까. 그런데도 그 당연함이 묘하게 서러웠다. 물병을 건네고 돌아서며 생각했다. 왜 나는 늘 타인의 입술에서 나올 위로라는 링거를 기다리며 스스로를 고립된 섬으로 만드는 걸까. 내 안에는 서슬 퍼런 검사만 상주하고 있었고, 나를 지켜줄 변호인은 오랫동안 실종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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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숙소 앞 노점에서 코코넛 밀크의 달콤한 향기가 풍겨왔다. 나는 홀린 듯 걸음을 멈췄다. 50바트를 내밀고 스티로폼 도시락에 담긴 망고 찹쌀밥을 받아 들었다.


숙소 방으로 들어와 에어컨을 켰다. ‘띠리링—’ 기계음과 함께 쏟아지는 찬 공기가 땀에 젖은 목덜미를 식혀주었다.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연유가 듬뿍 뿌려진 망고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혀끝에서 녹아내리는 극강의 단맛이 긴장으로 팽팽했던 영혼의 근육을 탁, 하고 풀어주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부재중이던 변호인의 자리에 앉아 나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아. 상자 좀 잘못 옮겼다고 세상이 무너지진 않아. 이 지독한 더위 속에서 오늘 하루를 버텨낸 것만으로도 너는 충분히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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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정리를 마친 리더 J가 숙소 로비에서 나를 마주쳤다. 그는 수건으로 목의 땀을 닦으며 무심히 한마디를 던졌다.


“아까 많이 힘들었죠? 날이 너무 더워서 다들 예민하네요.”


예전 같았으면 그 한마디를 위로삼아 내 노고를 구구절절 읊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안에는 이미 내가 세운 단단한 변호인이 앉아 있었다. 그의 끄덕임보다 나의 웃음이 먼저 나를 안심시켰다.


“네, 덥더라고요. 그래도 저 망고 먹고 기운 차렸어요. 오늘 꽤 보람 있었네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J는 조금 의외라는 듯 나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들어갔다. 위로가 필요할 때가 아니라, 내가 내 편이 되지 못할 것 같을 때 나는 망고를 산다. 누군가의 인정을 갈구하는 대신 나의 평안을 먼저 두는 것. 그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삶을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가장 정직한 생존의 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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