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등의 강물 위에서 배운 것
방콕의 도로는 거대한 주차장이다. 학교 사역을 마치고 시내로 나가는 승합차 안. 창밖은 이미 붉은색 브레이크 등의 강물이 되어 흐를 줄을 몰랐다. 오토바이 부대와 툭툭(Tuk-tuk), 그리고 택시들이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신호는 10분째 바뀌지 않았다. 차 안의 에어컨 소리만 웅웅 거릴 뿐, 시간은 점성 높은 액체처럼 끈적하게 멈춰 있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손톱을 물어뜯으며 불안해했을 것이다. ‘지금 출발해도 늦을 텐데.’ ‘가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여기서 시간을 버리고 있네.’ 내 머릿속 시계는 여전히 런던의 속도로, 내 심장은 한국의 효율성으로 째깍거리고 있었으니까. 멈춰 있는 시간은 내게 ‘죽은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어야만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지독한 ‘생존 모드(Survival Mode)’의 중독자였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후드득, 꽝!
차 지붕이 뚫릴 듯한 굉음과 함께 세상이 회색빛으로 변했다. 동남아의 스콜(Squall)이었다. 하늘이 양동이로 물을 들이붓는 듯한 기세에, 도로 위의 모든 소음이 빗소리에 먹혀버렸다. 오토바이들은 황급히 고가도로 밑으로 몸을 피했고, 도로는 완벽한 정지 상태가 되었다.
자연이 내린 거대한 강제 정지 명령.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지는 빗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다, 나는 문득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발을 동동 구른다고 차가 날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걱정한다고 이 거대한 비가 멈출 리도 없었다. 그 완전한 무력감 속에서, 역설적으로 묘한 평온이 찾아왔다.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외부의 소음을 지워버리자, 내 안의 오래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쉬면 뒤처진다." "남보다 더 오래 책상에 앉아 있어야 이긴다."
가난으로 배우지 못한 한을 딸을 통해 풀려던 엄마의 목소리. 그건 사랑이었지만 동시에 채찍이었다. 엄마는 나를 1시간이나 넘게 걸리는 도시 학교로 보내며 내 등에 ‘생존’이라는 짐을 지웠다. 그때부터였을까. 내 뇌는 24시간 전투태세였다. 멈춤은 곧 도태였고, 휴식은 사치스러운 죄책감이었다.
하지만 이 빗속에 갇힌 좁은 차 안에서, 나는 문득 그 오랜 채찍질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비는 저렇게 맹렬하게 쏟아부으며 바둥거리던 세상을 일순간에 멈춰 세운다. 마치 ‘제발 좀 식히라”고 명령하듯이.
멈춘다는 건 기능 고장이 아니라, 과열된 엔진을 식히는 ‘냉각의 시간’이라는 것을. 나는 눈을 감고 빗소리에 호흡을 맞췄다. 늘 얕게만 헐떡이던 숨이 비로소 명치끝까지 깊게 내려갔다 올라왔다. 내가 멈추자, 내 안의 소란스러웠던 엔진 소리가 잦아들었다.
30분쯤 지났을까, 거짓말처럼 비가 잦아들었다. 에어컨 바람과 외부의 온도 차로 뿌옇게 흐려진 안경을 벗어 옷자락으로 닦았다. 다시 쓴 안경 너머로 세상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여전히 차는 막혀 있었지만, 유리창 너머 풍경은 아까와는 전혀 달라 보였다.
조급함이라는 렌즈를 닦아내고 본 세상은 생각보다 다정했다.
비에 젖은 도로 위로 가로등 불빛이 수채화 물감처럼 번지고 있었다. 옆 차선의 트럭 운전사는 창문을 내리고 빗물을 털어내며 휘파람을 불고 있었고, 비를 피하던 교복 입은 학생들은 서로 발로 물을 튀기며 깔깔거렸다. 바쁘게 달릴 때는 ‘장애물’로만 보였던 사람들이, 멈추고 나니 비로소 ‘풍경’으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신호가 바뀌고 차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붉은 강물이 다시 흐른다. 하지만 내 마음의 속도는 이전과 달랐다. 앞차가 늦게 가도 조급하지 않았다. 창밖의 야자수 잎이 빗물을 머금고 반짝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멈춤은 포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시 달리기 위한 가장 단단한 준비였다. 방콕의 붉은 신호등이, 그리고 이 요란한 소나기가 내게 가르쳐준 건 단순했다.
“멈춰도 괜찮아. 세상은 무너지지 않아. 오히려 더 선명해질 거야.”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나는 휴대폰을 꺼내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았다. 비 온 뒤의 방콕은 여전히 습했지만, 코끝에 닿는 공기는 한결 깨끗해져 있었다. 나의 내면도, 비로소 깨끗하게 씻겨 내려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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