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나 오늘은 정말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었어”
첫째의 모유수유가 20개월에 끝나고 남편의 기숙사 생활로 잘 만나지 못했었는데 설마 하는 마음으로 시댁에 가기 전 테스트기를 샀다.
두둥! 바로 두 줄이 떴고 어머님 아버님이 계신 자리에서 둘째 발표를 했다.
남편은 동그란 눈으로 도대체 누구 애냐고 물었다. (생각하지 못한 타이밍이었기에)
나도 물었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생겼을까? “
신기하게 첫째가 그때쯤 계속 머리를 바닥에 박고 엉덩이를 흔들어서 어머님이 왠지 동생이 생길 것 같다고 하셨는데 역시 어른의 말은 잘 들어야 한다.
어머님 아버님은 둘째 소식을 듣고 기뻐하셨다.
둘째의 태명은 하프로 지었다.
우리가 계획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선물(present)이라는 뜻으로
만삭이 되었고 둘째도 첫째와 같이 예정일을 채우지 못하고 나왔다.
첫째 때 병원에 간지 2시간이 안되어 자연분만을 했어서 둘째 때도 그렇겠다고 생각하며 진통이 오는 중에 돼지갈빗집에 들어가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
첫째 때 먹지 못해 너무 배고팠던 게 생각나서 허겁지겁 먹었다.
(그땐 몰랐다 이 밥 두 공기가 나에게 어떤 시련을 가져다 줄지)
하지만 둘째는 몇 시간이 지나도 나올 생각을 안 했고 갑자기 태반이 떨어져 호흡이 불안정해서 응급 수술을 해야 했다.
차가운 수술대가 얼마나 추운지 덜덜 떨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내가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마취제를 쓸 수 있는 용량이 한정되어 있다고 하셨다.
마취를 했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통증이 있는지 내 살을 눌러보셨는데 통증이 다 느껴졌다.
그러나 아이가 위험한 상황이었고 나는 배가 갈라지는 느낌과 고통을 다 느껴야 했다.
아이가 나왔다. 수술이 끝나고 다른 베드로 옮겨지는데 온몸이 다 덜덜 떨렸다.
남편에게 절대 첫째를 데려오지 말라고 했는데 남편은 덜덜 떨고 있는 나의 모습을 첫째가 보게 했고 나는 크게 마음이 어려웠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수술과정을 온몸으로 느낀 나는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고 병원에 있는 며칠 동안 악몽을 꿨다.
아이를 낳고 기쁘고 행복하기보다 마취가 안 들었던 수술은 나에게 큰 트라우마였다.
첫째 때는 어떻게든 모유수유를 하려고 노력했는데 둘째는 초유만 먹이고 모유를 중단했다.
일단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내가 회복되는 게 먼저였다.
남편은 신학교를 다니며 사역을 시작해서 많이 바빴고 나는 첫째와 같이 들어갈 수 있는 조리원을 선택했다.
12월이었기에 조리원 안은 바닥이 너무 뜨거워서 발이 데일정도로 온도가 높았고 며칠을 같이 있던 30개월 첫째는 그 환경이 답답해 엉엉 울었다.
나도 정말 울고 싶었다.
시댁과 친정도 각자의 일들로 나를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한 겨울에 첫째만 데리고 밖을 나갔다.
너무 춥고 힘든데 첫째가 조리원 안에서 우는 것보다 추워도 내가 밖에 나와 있는 게 나았다.
조리원을 나오고 남편이 쉬는 날 나는 출산한 지도 한 달이 안된 몸으로 그땐 운전을 못해서 버스를 타고 첫째를 키즈카페에 데려갔다.
남편에게 맡길 만도 한데 나는 첫째에 대한 마음이 특별했기에 꽁꽁 싸매고 나갔다.
첫째는 버스 타는 게 어려웠는지 계속 업어달라고 했고 이 아이를 업으면서 옆에 다니는 차들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나를 아기 낳은 지 한 달도 안 된 엄마로 봐줄까?’
나는 그때도 나보다 내 아이의 행복을 택했다.
그리고 평생 안 타던 추위를 얻었고 조금만 추워도 손목과 발목이 시리고 아픈 병을 얻었다.
친정과 시댁 도움없이 기저귀를 다 떼지 않았던 두 아가들을 돌보는 건 너무 힘들었고 나에게도 육아 우울증이 찾아왔다.
먼저는 가족과 친구 몇 명을 제외한 모든 인간관계를 다 끊었다.
누군가 내 안부를 묻는 것도 귀찮고 싫었다.
어느 날은 퇴근한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나 오늘은 정말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었어”
남편이 말했다.
“여보 우리 집 2층이라 뛰어내려도 안 죽어”
나는 내 마음을 왜 몰라주냐고 화낼 법도 한데 나한텐 화낼 힘도 없었다.
그냥 미친 사람처럼 깔깔깔깔 웃었다.
그땐 내가 우울증인지 몰랐다. '그냥 엄마들은 다 이렇게 힘들구나 '하고 넘겼다.
첫째가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했고 신생아를 유모차에 태우고 자기도 다리가 아프다며 우는 첫째를 안고 다녔다.
어린이집에서 집에 가는 길에 오르막길이 있었는데 그 오르막길에 오르면서 창피하지만 항상 욕을 했다.
”이 ㅆㅆㅆㅆ 정말 힘들다. 정말 힘들다!!!!!! “
나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기도와 말씀이 우리를 치유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 나와 같이 육아 우울증을 겪는 누군가에게 기도하세요. 말씀 읽으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육아 우울증은 나를 무기력하게 해서 무언가 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냥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고 나처럼 '창문에 뛰어내리고 싶다.'까지 생각했다면 병원에 가서 적절한 치료를 받길 권유한다.
나는 사모라는 그 이름 안에서 내 어려운 마음을 누군가에게 나누지 못했다.
주일엔 두 아이의 용품으로 꽉 찬 군대 가방을 들고 교회에 가서 힘들어도 사람들을 보며 웃었고 웃어야만 했다.
주중에는 집에서 항상 같은 패턴을 반복하며 무력해져 갔다.
“이 쳇바퀴 같은 삶 그만하고 싶다.”라고 계속 외쳤다. 몸도 마음도 정신도 온전한게 하나 없었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돼서야 내가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지, 얼마나 부족한 엄마인지, 얼마나 인내심 없는 인간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시절엔 너무 힘들었지만 말해주고 싶다.
힘든 만큼 내 내면의 어린아이가 조금씩 자랐고 약해 빠졌던 정신이 조금은 강해졌다고
나는 대학병원에 가서 피를 뽑아야 할 때, 뭔가 어려운 일을 도전해야 할 때 신기하게 머릿속에 이 생각이 든다.
“나는 두 아이를 낳은 엄마인데 뭐가 무섭냐!!!!! 나는 할 수 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 고백이 나를 단단해지게 한다.
나는 지금도 두 아이의 엄마로 자라나고 있다.
사랑하는 나의 두 아기들 메리야 하프야.
언제나 갈대 같은 엄마였는데 너네 덕분에 조금은 단단한 갈대가 된 것 같아 감사해.
부족한 엄마이지만 아직도 엄마의 옆에 붙어 자고 싶어 하는 사랑스러운 나의 아가들.
엄마의 아기로 와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너희들 덕분에 엄마가 더 멋있게 자랄 것 같아 기대가 돼.
사랑한다 나의 아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