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내 나이의 엄마를 만난다면 말없이 꼭 안아주고 싶다.
남편과 결혼을 하고 일찍 찾아온 첫째 메리의 출산과정은 쉽지 않았다.
어느 날 교회가 끝나고 화장실에 갔는데 피가 나왔고 배가 자주 뭉쳤다.
다니던 산부인과에 갔더니 아직 임신 중기인데 자궁 경부가 짧아져 아이가 나올 거 같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대로 대학병원에 옮겨졌고 아이가 뱃속에 있어야 가장 건강하기 때문에 아이가 빨리 나오지 않도록 주사를 맞았다.
나라에 보험이 되는 주사는 부작용이 컸고, 가격이 있는 주사는 너무 비쌌다.
그래도 나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나라에 보험이 되는 주사를 선택했다.
주사를 맞으니 온몸이 떨려왔다.
심지어 혼자 있을 때 밥을 먹는데 손이 덜덜 떨려서 수저를 들지 못했고 혼자 서러워서 엉엉 울기도 했다.
나는 고위험 산모라 씻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엄마와 동생이 왔고 간호사 언니에게 사정했다.
“선생님 제발 씻게 해 주세요 ㅠ.ㅠ”
선생님은 내가 안쓰러웠는지 의사 선생님 몰래 나를 씻게 해 주셨다.
샤워실에서 어느덧 만삭이 된 내 몸을 엄마와 동생이 씻겨주었다.
나는 행복해서 깔깔거리며 울다가 웃기를 반복했다. 동생은 내가 병원에 있더니 좀 이상해졌다고 했다.
고위험 산모실에는 날마다 슬픈 일이 일어났다.
커튼 하나를 두고 산모들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서로의 상태가 어떤지 진료를 보러 오는 의사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내 옆의 산모는 세 쌍둥이었는데 셋 중 한 아이가 하늘나라로 갔고 그 아이를 꺼내려면 세명을 다 꺼내야 했다.
그래서 수술을 했고 두 명을 얻고 한 명을 보냈다.
나는 보이지 않았지만 산모의 통곡하는 울음소리를 듣고 함께 울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주님 제가 감사함을 잊고 있었습니다. 지금 힘들어도 견딜 테니 뱃속의 이 아이 지켜주세요.”
시간이 지나고 병원에서 이젠 아기가 언제 나와도 상관없으니 퇴원을 하라고 해주셨다.
집에 가면 아기가 바로 나올 수 있으니 늘 준비하라고 하셨다.
집에 돌아와서 너무 행복했다.
그러나 한 가지 두둥! 우리 집엔 에어컨이 없었고 한국의 7월은 너무 더웠다.
나는 냉동실 페트병에 물을 얼려 그 얼음 덩어리를 안고 잤다.
만삭이 돼 배에 꽉 차있는 아이와 함께 여름을 겪는 건 쉽지 않았다.
퇴원한 지 며칠이 안되어 진통이 왔다.
너무 감사하게도 병원에 가자마자 2시간 만에 첫째를 낳았다.
너무 작은 생명이 얼마나 이쁘던지 남편은 폭풍 눈물을 쏟았다.(내가 안운건 비밀)
나는 내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는 게 아직 실감 나지 않았다.
아기를 조리원으로 옮길 때 양가 아버지들의 사랑이 지극히 너무 커서 한여름 7월에 차 에어컨도 틀지 않고 그 뜨거운 차로 당신들도 땀을 뻘뻘 흘리며 아기를 옮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아기가 누구보다 온도에 얼마나 민감한지 몰랐다.
나도 남편도 아버지들도 몰랐기에 그 더운 차를 타고 조리원으로 갔다.
땀을 줄줄 흘리며 웃던 양가 아버지들을 생각하면 웃기고 감사하다.
조리원은 조리하는 곳인데 나는 잘 쉬지 못했다.
모유수유로 젖몸살을 크게 앓았다.
그리고 귀가 예민한 편이라(음악을 해서가 아니라 아빠 덕분에) 밤낮 울어대는 아기들 소리에 내 아이가 우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 잠을 못 이루었다.
집에 돌아오고 조리원에서 좀 잘걸 후회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밤새 통곡하며 울었고 초보 엄마 아빠는 이유를 몰라 난감했다.
남편은 아이가 50일이 지나고는 우는 아이를 데리고 새벽에 산책을 하고 들어왔다.
해가 뜨는 그때서야 아이는 잠들었다.
그때 남편은 신학생 1학년으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고 우리는 주말부부를 했다.
남편과 나 둘 다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나는 20개월까지 모유수유를 했고 아이와 고군분투하며 시간을 보냈다.
100일 1년 2년...... 지금 10년까지 함께하고 있다.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그때 내 나이의 엄마를 만난다면 말없이 꼭 안아주고 싶다.
어떻게 밤마다 떨게 하는 그 남편을 놓지 않았냐고, 어린 세 자매들을 키웠냐고 너무 멋지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어느 날 수박을 먹었는데 수박이 맛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 수박이 맛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때야 알았다.
아이들이 좋은 부분을 먹었으면 좋겠어서 나는 끝에 그 딱딱한 부분만 먹고 있었다는 것을..
고기를 먹어도 살코기는 아이입에 내가 싫어하는 다른 부분만 먹어댔다.
어렸을 때 맛있는 걸 우리에게 주고 마지막으로 먹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이해가 된다.
그 음식을 안 좋아해서가 아니다 그냥 내 자식이 귀하기 때문에 먹지 않아도 먹는 모습으로 행복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생일날은 나의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일이 다가올 때 엄마에게 생일 선물을 당연히 요구했다.
고맙다는 소리 한마디 안 했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어보니 생일날은 나를 위한 날이 아니었다.
엄마가 가장 대접받아야 하고 사랑받아야 하고 축하받아야 할 날이었다.
사랑하는 작은 거인 우리 엄마에게.
“ 엄마 어려운 상황에서도 늘 우리 세 자매의 따뜻한 엄마가 되어주어서 고마워요.
엄마의 기도가 아니었다면 우리 세 자매 모두 이렇게 이쁘게 자라지 못했을 거예요.
그땐 보이지 않았지만 엄마가 한 그 눈물의 기도가 이제 열매가 되었어요.
작지만 거인처럼 강한 우리 엄마 지금처럼 건강하게 우리 곁에 있어주세요. 사랑해요. “
-둘째 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