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프로젝트>, 션 베이커
어린 시절 살았던 주택집은 기다란 골목의 끝에 있었다. 골목 안쪽을 향했을 때 좌측으로 벽돌담이 높게 쌓여 있었다. 구멍 난 벽돌들을 덩굴이 휘감고 있었는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 매일 골목을 걸었던 내가 무엇에 호기심을 빼앗겼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난 골목의 끝 내가 사는 집의 현관문 맞은 편 벽돌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곳에 누군가 종종 찾아와 맛있는 것을 숨겨 놓고 간다고 믿었다. 매일 허탕을 치면서도 오늘은 분명,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아마 그보다 더 먼 과거 짓궂은 친척이나 이웃이 날 가지고 장난을 쳤겠지. 더 이상 그려지지 않는 얼굴의 누군가 고안해 낸 속임수를 마법으로 경험하고 느꼈던 어린 시절의 나. 모든 것이 마법 같았던 시절.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부모는 종종 그 시절의 나에게 사과를 한다. 넌 참 고생 많았다며. 누가 고생했단 걸까? 벌레와 벌레알, 달팽이와 개미들. 자연이 듬뿍 담겨 있던 우리집. 초등학교였나 중학교였나, '실험관찰'이란 제목의 교과서를 사용했던 적이 있다. 과학 교과서랑 함께 쓰던 책이었다.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과학 공부 따로 할 필요 있나, 사는 게 곧 과학 수업인데"라고 했었다. 내가 한 말인가? 아마 엄마가 한 말이겠지. 엄마는 초면인 사람도 체면을 잃게 할 정도로 입담이 좋다.
가난. 내 부모는 세상에 돈이란게 있어서, 수중에 돈이란게 없어서, 세상으로부터 모진 대우를 받아왔다. 혹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래서 다 큰 나한테 20년 묵은 사과를 한다. 사과를 해야할 사람도,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도 없는데. 어린 나는 가난을 알지 못했다. 달걀에 간장 넣고 비빈 밥은 정말로 맛있었고, 달걀 없이 간장만 넣고 비빈 밥도 특유의 고소함(어린 난 고소한 맛이 무슨 맛인지 알지 못했다)이 있었다. 커다란 김에 밥만 깔고 말아 한 입씩 베어 먹는 일은 맛도 있고 재미도 있었다. 밥상 위 시래기국이 슈퍼 밖에 버려진 시래기를 가져다 끓인 것인지 내가 알게 뭐람. 뼈다귀국이 가장 싼 음식이어서 일주일에 두세번을 먹었다는 사실이 고기맛을 떨어뜨릴 수 없는 법이다.
벌레가 아무리 많아도 다섯 살짜리 소년의 상상력까지 갉아먹진 않는다. 찢어진 창호문 너머 살았던 나의 포켓몬들. 장롱문 뒤에 숨은 악의 무리들. 레이저를 피해 몸을 제빨리 굴리던 나의 경이로운 날렵함! 그리고, 이렇게 전장에서 땀흘리는 날 위해 벽돌의 작은 구멍들 속에 비상식량을 숨겨두었던 그 고마운 누군가. 내 시크릿 에이전트.
어른들이 추방당한 세계 속에서 어린이들은 행복하고 안전하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무니는 버려진 집에 쌓인 먼지도 유령이 남기고 간 '응가'로 보이기 때문에, 아니, 응가'이기' 때문에 그저 웃기고 재미난 대상이다. 아이스크림 하나도 셋이 나눠먹으면서도 마지막 한 입을 양보할 마음씨가 생길 정도로 넉넉하다. 자신에게 침을 뱉은 아이들과도 쉽게 친해지는 잰시. 자신이 침을 뱉은 아이임에도 부탁을 청하는 무니. 어른들이 넘지 않으려 애쓰는 선들, 선들이 그어져 있다는 사실조차 보기 힘든 아이들. 보지 않는 아이들. 볼 필요가 없는 아이들.
싱글맘 핼리의 가난과 방종은 딸 무니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간지럼 괴물 놀이를 해주면 충분하다. 와플 심부름을 시켜도 괜찮다. 호객을 하며 물건을 거짓으로 팔아도 괜찮다. 성매수 남자들을 맞기 위해 억지로 목욕을 시켜도 괜찮다. 간지럼 괴물로 남아있어주면 충분하다. 당장 이번주 방세도 막막하지만 핼리와 무니는 함께 춤을 춘다. 핼리는 무니의 웃음이 있어 벅찬 현실을 하루씩 견뎌나간다.
그래서 핼리와 무니는 당당하고 확고하다. 아동국 직원들이 무니를 핼리에게서 '빼앗는' 상황 속에서도. 무니는 도망치고, 핼리는 자신에게 부모 자격이 없다는 것을 끝내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의 판단 기준에 크게 미달할지라도, 핼리와 무니는 지켜야 할 자신들만의 세상이 있다. 그 세상이 비록, 미처 '아이'를 벗어나지 못한 핼리와 어른에 대해 어른보다 더 잘 이해하는 '아이' 무니 사이 불균형 속에 지어진 것일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건, 간지럼 괴물 놀이를 함께 해 줄 사람이 전부인지도 모른다. 지겹고 무겁고 두려운 이 세상 속에서 짧은 순간이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사람이면, 오늘 '하루 더' 견딜 수 있다. 무지개 끝에 황금이 없어도 괜찮다. 황금은 이미 난쟁이 몫이어도 괜찮다. 그 난쟁이도 간지럼 타는 한 군데 정도는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