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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르네바 Mar 25. 2024

영원히 갱신되는 시작_

타르콥스키, 기도하는 영혼

대학 2학년 때였을까. 처음으로 타르콥스키의 영화 <거울>을 보기 ‘시작’했다. 추천 목록에 떠 있는 걸 임의로 틀었을 뿐 타르콥스키란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룸메이트와 저녁을 먹으며 보기 시작하여, 식사를 마치고도 20분쯤은 더 봤던 것 같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어느 순간 두 쌍의 눈이 마주쳤고, 우린 ‘허허’하고, 그 소리마저도 헛헛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뭐야?” 한 시간은 족히 봤지만 영화의 줄거리도, 상징도, 어떤 한 가지 의미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고 몇 년 후, 이 영화를 다시 보았지만 흐릿한 감상은 여전했다. 영화의 첫 프레임부터 엔딩 크레딧의 마지막 한 줄까지 인내심 있게 지켜본들, 영화를 ‘봤다’는 소박한 말이라도 꺼낼 수 있게 해주지 못했다. 

            타르콥스키의 다른 영화들은, 밥상 머리 앞에서 유튜브 틀듯 가벼운 태도로 다가가지 않았음에도, 대상물로부터 영원한 소외, 그저 한없이 멀어지는 듯한 경험을 선사하였다. 결국 난 계속된 시작, 문법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시작의 미래완료진행형 속에 갇힌 셈이다. ‘그래, 두 번째 보면 좀 이해가 되겠지. 아니, 다섯 번은 보면 충분할 거야.’

            

충분하지 않았다. 그 때 나타난 한 줄기 빛! 내 무지한 영화 경험을 구원해주리라 확신하며 아들 타르콥스키의 다큐멘터리 <타르콥스키, 기도하는 영혼>(이하 기도하는 영혼)을 보았고, 아버지 타르콥스키의 <시간의 각인>을 읽었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영화들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고, 여전히 난 미계몽 상태 속에 남겨져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대한) 2차 자료들로부터 몇 가지 단서와 공감, 얕지만 분명한 배움들을 얻을 수 있었다. 

 

            우선 타르콥스키의 예술론에 대해서. 그는 <시간의 각인>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실 20세기 후반의 예술도 신비감을 상실했다. 오늘날 예술가는 즉각적이고 전폭적으로 인정받기를 바란다. 정신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즉시 대가를 받기를 원한다. (…) 이른바 현대 예술은 무엇보다 자기 과시이다. 예술의 방법이 예술의 의미와 목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현대의 예술가 대다수는 노골적인 노출증에 빠진 나머지 바로 이 방법을 과시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예술의 유일무이성, 예술의 가까우면서도 먼 특성, 즉 예술의 아우라.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의 특징에 대해 ‘아우라의 상실’을 주장했다. 타르콥스키가 말하는 예술의 신비감과 벤야민의 아우라는 상통하는 개념이다. 위 구절은 현대 예술의 산업화를 비판하고 있는데, 이러한 비판 이면에 놓인 타르콥스키의 감정을 뒷받침하는 것은 그의 신앙심이다. 

            <기도하는 영혼>에서 타르콥스키는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면 /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 러시아에만 있다고 말하고 싶다. / 어떤 의미에서의 희망 …. / 핵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 문명이 곧 종말을 맞을 수도 있다. / 창조주를 믿는 마지막 사람이 / 죽으면 그렇게 된다. / 영성 없는 문화, / 인간 영혼의 불멸을 / 믿지 않는 문화는 / 짐승 떼에 지나지 않는다. / 문명이라 부를 수 없다. / 결국은 쇠락하게 된다. / 그래서 나는 서구에서보다 / 러시아에서 더 많은 / 영적 부활의 징후를 본다.”

            이렇게 타르콥스키의 예술론은 그의 신앙으로 이어진다. 타르콥스키는 이미지에 대한 해석이나 복잡하고 커다란 상징을 배척했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는 난해하게 여겨진다. 모순적이라 느껴진다면 그의 종교적 태도에 그 모순에 대한 해답이 있다. 아침놀이 스며드는 산속을 걷다가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호수 위로 어렴풋이 떠오른 물안개, 이런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우린 이런 풍경 속에 홀로 서서 황홀함, 경건함, 육체가 승화되고 있는 듯한 감각, 아무튼 어떻게 하여도 형언하기 어려운 그런 감각을 느낀다. 유럽의 웅장한 성당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성가대의 목소리는 신앙과 무관하게 마음을 정화시키는 힘을 지닌다. 

            타르콥스키가 예술로 가 닿고자 한 지점이 바로 이 신적인 황홀경 아니었을까? 원시 부족들의 집단 의례가 선사하는 일체감과도 비슷하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과 무관하게 우린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산속을 걷는 산책자가 느끼는 상쾌함은 종교와 무관하다. 종교적 감성은 종교 그 자체와 무관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 감성은 어쩌면 사랑의 원천이며 그 사랑의 원천은 신의 사랑처럼 범위에 제한이 없고 무한하다. 그렇기에 “창조주를 믿는 마지막 사람이 죽으면” “핵폭탄이 떨어지기 전에 문명이 곧 종말을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의 범위가 제한적이고 유한하다면, 그 범위지음으로 인하여 범위 안팎에 있는 모든 것이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평론가 정성일은 <기도하는 영혼>에 대한 해설 <나는 믿는다,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이 모든 것을_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세계가 몰락하기 이례 전에 온 사람>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들은 이미 창작의 위대한 시간, 창조라는 기적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자들이다. 나는 그들과 나눌 것이 없다. 기적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믿음에 대해서 함께 논할 수 있을까.”

<거울>을 보고 옥신각신 하는 관객과 평론가들을 내쫓는 청소부가 내놓은 영화에 대한 깔끔한 해석. 예술은 이처럼 인간의 영혼에 가 닿아 그 영혼을 정화시키고 강하게 진동토록 하는데, 무언가를 가르고 판단하고 분류하려는 인간 이성의 오만은 이 자연스러운 과정을 계속하여 방해한다. 타르콥스키는 우리가 그의 영화로부터 무엇을 보기를 바랐을까? 아무것도. 보이는 것을 볼 것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아주 간단해요. 한 남자가 끔찍하게 아팠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한 끔찍한 일들을 생각하고는 사과하고 싶어 했어요. 이제 됐나요.”(기도하는 영혼)

             

이런 단서들과 함께 미처 ‘끝맺지 못한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의 요구대로라면 영화처럼 각인된 시간도 끊임없이 다른 모양새로 보여질 것인데, 각인되지 못한 시간 속에서 줄곧 갱신되는 현재 속을 표류하는 내가 어떻게 그의 영화를 하나라도 마무리 지을 수 있겠는가. 한 가지 변화 속에서 다른 변화를 포착하는 것이 가능할까. 타르콥스키 본인이 주장하듯, 우리는 생리학적으로 한 가지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다. 난 결국 영원한 시작으로 되돌아 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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