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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은 어떻게 중국의 산업화에 성공했는가?

《덩샤오핑 평전》- Ezra Vogel

by 김영수
덩샤오핑이 이끌어 낸 구조적 변화는 2000여년 전 한 제국이 건국한 이래로 중국에서 가장 근본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p897)


덩샤오핑의 역사적 위상에 대한 보겔 교수의 평가다. 왜 가장 근본적인 변화라고 했을까? 10억 명이 넘는 중국인들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살게 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뿐 아니라 세계사를 통틀어서도 이만큼의 임팩트를 가져온 통치자는 찾기 어렵다.


덩샤오핑의 여정을 따라가며, 한 가지 질문에 집중했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수많은 지도자가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중국의 산업화를 덩샤오핑은 어떻게 성공시켰을까?


오랜 기간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해온, 실제 전세계 GDP의 30% 이상을 차지하였던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철저한 굴욕을 당한다. 이후 100여 년간 겉잡을 수 없는 추락과 치욕을 경험한다. 중국을 압도한 서구의 군사력이 산업혁명 및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인함을 파악한 중국의 통치자들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산업화를 통해 서구를 따라잡는 것이었다. 하지만, 청말 동치제, 광서제 등의 황제와 양계초, 강유위 등의 개혁가, 그리고 민국 시기 손문과 장개석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모택동은 공산당을 이끌고 내전에서 승리하여, 영토 수복 및 통일 국가 건설에 성공한다. 그러나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그가 취한 조치들은 엄청난 재앙을 초래했다. 덩이 권력을 장악한 1978년, 중국의 경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改革开放.jpg 92년 심천에 세워져 개혁개방의 상징이 된 덩샤오핑 관련 선전벽화 (Source: 澎湃新闻)

농촌개혁: 산업화의 토대


덩은 과연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보겔 교수가 지적했듯이 그에게는 마오가 구축한 효율적인 정당 및 국가 조직, 개방적인 국제 무역환경 등 유리한 조건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은 통치자가 정확한 방향으로 리더십을 발휘했을 때 긍정적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다. 더군다나 중국은 이제 막 문화대혁명이라는 광기에 가까운 정치운동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이전 통치자들과 구별되는 실질적 개혁 정책들, 그리고 그 정책의 실행을 담보한 통치력이 덩샤오핑의 성공을 이해하는데 있어 훨씬 중요하다.


우선, 산업화를 성공시킨 일련의 정책을 살펴 보자. 덩의 집권 당시 10억 인구의 80% 이상은 가난한 농민이었다. 저자가 지적했듯이 1978년 중국의 인당 식량 소비량은 1957년보다도 낮은 상황이었다. 이는 생산력 증대가 미흡했기도 했지만, 1949년 6억 명이었던 인구가 1978년에는 10억 명까지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중국은 아직 농업생산력의 증대가 더 빠른 인구 증가로 귀결되는 '멜서스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1978년 완리의 지휘 하에 안휘성에 도입했던 농가책임생산제('포산도호' 정책)는 잉여 생산물을 가족 단위에서 소유 및 유통할 수 있게 함으로써 생산력의 획기적 증대를 가져왔다. 이와 동시에 덩은 천윈의 제안을 받아들여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을 실시한다. 이 두 요소가 결합되며 중국은 비로소 16세기 이후 지속된, 생산력 제고와 인구 폭발이라는 악순환 고리를 끊고 실질적 농업생산성 향상을 이뤄낸다.

nongcun_sina.jpg 완리 당시 안휘성 서기가 지휘한 농촌개혁(Source: 财经)

농업생산성 향상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농업생산성은 줄곧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산업혁명을 위해서는 공업의 발전 및 이를 가능케 하는 시장의 형성이 필수적이다. 농가책임생산제의 성공에 확신을 얻은 덩샤오핑은 기존 경제단위였던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남겨진 설비를 활용해 향진기업을 집중 육성한다. 식량부족이 해결되며 형성된 잉여노동력은 향진기업들로 빠르게 흡수되며 노동집약적 제조업의 비약적 발전을 가능케 했다. 농민의 소득 증가는 이들 향진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의 소비로 이어지며 시장을 확대시켰다. 한편 도시에서는 개체호 허용을 통해 농촌에서 돌아온 젊은이들을 고용하였고, 경제특구지역은 화교자본 유치를 통한 수출형 공업을 본격 육성하였다. 연해지역 도시의 급성장은 전반적 도시화로 귀결되며 산업화를 가속화하였다.


이전 통치자들의 정책과 무엇이 달랐을까? 모택동이 산업화 추진을 위해 만든 인민공사는 개개인의 동기부여 관점에서 치명적 약점이 있었고 수천만 명이 굶어 죽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다. 덩은 가족을 기본적 경제주체로 환원함으로써 동기부여 문제를 해결했다. 청말 및 민국 시기의 개혁은 서양의 제도 및 기술 도입에 치중했다. 당시 농촌은 가족이 기본적 경제단위이긴 했지만 봉건 지주제 하에서 소작농인 농민들에게 잉여생산물의 실질적 소유는 불가능했다. 지역 단위 자급자족적 경제 구조 하에서 공업화를 뒷받침하는 시장의 발전 역시 매우 제한적이었다.


실용주의적 리더십: 산업화의 엔진


이와 비교해 볼 때, 농가책임생산제, 산아제한, 향진기업 육성, 개체호 허용, 경제특구 정책 등을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하며 산업화라는 근대 중국의 최대과제를 해결한 덩샤오핑의 솜씨는 실로 대단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사실 결과론적인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덩샤오핑이 처음부터 이러한 정책의 청사진을 명확히 갖고 있지는 않았다. 덩의 위대함은 이들 정책 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엄청난 불확실성에 직면한 상황에서 이들 정책을 발굴하고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실행력을 담보해낸 리더십에 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공평한 평가일 것이다.

흑묘백묘2.jpg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Source: 搜狐网)

공친왕의 양무운동, 광무제의 무술변법, 손문의 공화정에 이르기까지 근대 중국의 실패한 개혁에는 항상 기득권 세력의 반발, 대중의 지지 부족 등의 요인이 존재했다. 덩샤오핑 역시 문화혁명 기간 두 번째 실각을 경험하며 마오쩌둥의 지지를 받는 것이 그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깨닫는다. 그는 일흔살이 될 때까지 수십 년간 마오의 명령을 수행하며 그의 신임을 얻어온다. 1975년말 드디어 평생의 승부수를 던진다. 문혁을 긍정하라는 마오의 요구에 처음으로 대항하여 끝까지 굴복하지 않다가 세 번째로 실각된다. 그러나 이 때의 저항은 후에 개혁을 드라이브할 수 있게 하는 강력한 정치적 자산이 된다.


마오의 사후 중앙정부로 복귀한 덩은 실제 행동과 성과로 대중 및 중간리더들의 지지를 획득해 나간다. 앞서 언급한 포산도호 정책은 사실 60년대초에 이미 천윈이 수립했던 것이다. 아무리 정확한 정책이라도 실행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 1978년 덩은 중앙정부에서 포산도호 정책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자칫 주자파로 다시 몰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1975년 철도국 개혁을 능숙하게 완수했던 완리에게 안휘성 일부 지역에서 먼저 이 정책을 테스트하게 한다. 그 성과가 명확해지자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과감하게 정책을 확대한다. 논쟁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행동으로 지지를 획득하는 방식으로 그는 개혁 초기 화궈펑과의, 그리고 여러 번에 걸친 천윈과의 권력 싸움에서 승리하고, 90년대초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다.


2020년의 한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잠재성장률의 하락, 고령화, 4차 산업혁명, 미중분쟁, 거기에 팬데믹까지. 지난 50여 년간 쌓아온 산업화와 민주화의 틀로는 해결이 어려운 난제들이다. 새로운 정책 대안들에 대한 근본적 논의와 방향성 정립이 시급한 시점이다. 하지만, 우리 정치권은 아직 진영 싸움과 편가르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화대혁명이라는 극단적 갈등을 극복하고, 150년동안 미뤄진 역사적 과업을 완수한 덩샤오핑의 실용적 리더십은 그래서 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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