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 시간은 대체로 새벽 4~5시. 눈을 뜨면 전날 밤 아이를 재우다가 같이 잠들어버려서 미처 끝내지 못한 일들이 쌓여있다. 급한 일들을 얼른 처리하고, 오늘 일정을 정리해 보고한다. 보고를 마치면 그때부터 출근 준비 시작. 파주에서 서울까지 가려면 새벽부터 서둘러야 한다.
출근하고 나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빨리 흐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서둘러 업무를 마무리짓는다. 여유를 부리며 야근할 수 있는 날은 손에 꼽는다. 복직 전만큼 장시간 일에만 매달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남편의 야근으로 내가 어린이집 하원을 맡게 되는 날은 마음이 더 급하다. 부랴부랴 어린이집으로 달려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하루 종일 둘째 봐주시느라 고생하신 시아버지의 저녁을 차리고, 첫째도 저녁을 먹인다.
저녁을 먹고 난 다음엔 아이들과 함께 놀고, 목욕하고, 책 읽고, 같이 잠든다. 한참 자다가 눈을 번쩍 뜨면 새벽 4~5시. 그러면 도로 잠들지 못하고 일어나서 노트북 앞에 앉는다. 어젯밤에 '해야 되는데...' 하다가 결국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오늘 일정을 정리해 보고하면 다시 출근해야 할 시간이다.
복직 6개월 만에 번아웃
3년 전, 2년 6개월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나의 하루 일과다. 기자이자 34개월, 9개월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나의 하루는 매일같이 숨 가쁘게 굴러갔다. 몸이 아파도 해야 할 일이 늘 산더미라 제대로 쉬질 못했고, 그래서 푹 쉬기만 해도 낫는다는 감기를 6개월 내내 달고 살았다. 몸도, 마음도 엉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간이 멈췄으면... 모든 게 다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적극적으로 죽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이런 생각이 든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날 이후, 내 머릿속에는 '쉬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쉬고 싶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선배도, 후배도, 엄마도, 아내도, 며느리도 아닌 그냥 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숨 막히게 만들었고, 결국 나는 정신줄을 놓은 채 '감당도 못할 거면서 애를 둘이나 낳은 내 자신이 싫어'라는 카톡을 남편에게 보내고 말았다.
지금은 당시의 내가 번아웃 상태였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그땐 그냥 제정신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아이고! 내가 드디어 미쳤구나!' 싶었다. 남편은 카톡을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걸어서 회사도 가지 말고, 집에 있지도 말고, 온전히 쉴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원하는 만큼 쉬고 오라고 말했다.
나 혼자 제주로
그 말을 들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제주로 떠났다. 제주는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제주에서 혼자 보낸 다섯 밤과 여섯 날 동안, 나는 푹 자고, 잘 먹고, 마음껏 쉬었다.
집안일도, 회사일도 잠시 접어두고,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을 돌보는 데 집중했다. 따뜻한 햇볕을 쬐며 산책하고,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며 먹었다. 매일 카페에 가서 바다를 바라보며 멍때리거나, 맛있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책을 읽었다.
그러자 우울한 감정에 짓눌려 잊고 지냈던 일상의 사소한 감각들이 하나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여행을 하면서 나날이 생기를 찾아가는 느낌이 좋았지만, 한편으론 두렵기도 했다. 마지막 날이 되어서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그땐 어쩌나 하는 불안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제주를 떠나 집으로 향하는 내 마음은 매우 홀가분했고, 가족들도 아주 많이 보고 싶었다.
일도, 육아도 힘 빼기
그렇게 나는 정확하게 내가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물론 여행을 다녀온 이후, 내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하고, 회사에서 퇴근하면 집으로 출근했다. 밤엔 녹초가 된 채 쓰러져 잠들었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일도, 육아도 조금씩 힘을 빼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자는 마인드로 바뀌었다는 거다. 또다시 재가 될 순 없으니까 일도, 육아도 완벽하게 잘하는 워킹맘에 되겠다는 허황된 꿈같은 건 갖다 버리고, 삶의 모든 면에서 조금씩 내려놓기로 했다.
일할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빠르게 판단해서,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했다.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온전히 일에 쏟을 수 있었던 과거의 나와 그럴 수 없는 현재의 나를 더 이상 비교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들 키울 때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이돌보미 등 모든 자원을 최대한 동원했다. 그리고 육아에 도움을 주시는 모든 분들께 미안함보다는 감사한 마음을 갖기로 했다. 덕분에 일과 육아 사이에서 허우적대면서도 하루하루 살아나갈 수있었다.
두 번째 육아휴직을 결심한 이유
하지만 여전히 쉽게 해소되지 않는 불편한 감정이 하나 남아 있었다. 두 돌까지 내가 독박 육아로 키운 첫째와 달리, 백일부터 공동 육아로 키운 둘째를 생각하면 (미안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상하게 미안한 마음이 자꾸 들었다.
그렇다 보니 내 머릿속에서는 언제나 두 번째 육아휴직은 언제 하는 게 좋을까고민이 떠나질 않았다. 일하고 싶은 마음(나는 정말 '애 볼래? 밭맬래?' 하면 바로 밭으로 뛰어갈 인간이다)과 부모의 손길을 많이 필요로 할 때 아이들 곁에 있어주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이 문제를 두고 남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오랜 논의 끝에 2021년에 육아휴직을 하기로 합의했다. 각자의 커리어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이 부모를 가장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자는 게 우리의 결론이었다.
물론 이대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일상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위기의식도 있었다. 둘 다 인생에서 최대의 에너지를 끌어모아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지만, 조만간 바닥을 드러낼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가까운 미래에 두 번째 육아휴직을 하기로 결심했고, 어쩌면 그때부터 제주살이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