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말고 오늘
2015년 가을, 짧은 외국살이의 기억이다.
그때 나는 교환학생에 합격해 만인의 로망 파리에서 한 학기를 보내게 되었다.
이전에 여행으로 들렀을 때 개선문을 못 오른 것이 아쉬웠는데, 꼭 그 정상을 밟아보리라 다짐하며 비행기에 올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도착한 파리에서 쉬는 시간에는 미술관을 구경하고 목구멍에 와인을 들이붓고 근교 여행을 다녔다.
하지만 샹젤리제 거리에 매주 놀러 가면서도 개선문을 오르는 일은 왠지 한없이 미루어졌다.
그러는 사이 파리를 떠나는 날은 금세 다가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면서 개선문을 오르는 일은 내 마음의 짐이었다. 아, 올라야 되는데! 떠나기 전에 한 번은 그 풍경을 봐야 하는데!
... 하지만 오늘 추우니까 다음 주말에?
그러다 겨우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이 되어서야 개선문을 올랐다.
겨울의 파리, 익숙한 흐린 하늘 아래서도 샹젤리제 거리와 에펠탑은 고고하고 아름다웠다.
상상한 것보다 더.
좀 더 일찍 올라가서 그 풍경을 봤으면 어땠을까?
시간이 좀 남았을 때 처음 올랐더라면 떠나기 전까지 여러 번 그 풍경을 볼 수 있었겠지. 맑은 날이나 비 오는 날엔 또 어떻게 다른지 직접 볼 수 있으면 좋았을 것 같았다.
그때 얻은 교훈으로 뭐든 미루지 않고 나서는 사람이 됐다고 글을 마무리하고 싶지만 그렇진 않다.
난 다시 게으른 사람이 됐다. 워킹홀리데이를 미루고 미루다가 막차도 놓치게 생긴 직장인, 그게 지금의 나다.
어제는 이럴까 저럴까 고민하다가 밤을 꼬박 새웠다. 다음으로 미룰 핑계는 끝도 없이 많아서.
오늘은 연차라서 늦잠을 자고 일어나 씻지도 않고 휴대폰 게임만 했다.
그러다가 그냥 갑자기 저 때 생각이 났다. 개선문 오르는 걸 미루는 나와, 워킹홀리데이를 미루는 나.
사람 잘 안 바뀐다지만 이건 너무하다. 남은 오늘 영문잔액증명서와 비자검진 예약을 하기로 한다. 흐린 하늘아래서도 고고하던 그 풍경을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