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10명의 남자친구, 두번째 연애

하루종일 찾은 옥수수중 가장 좋은 옥수수는 바로 처음 본 그 옥수수였다!

by whysoserious

그 남자와 헤어진지 몇달 지나지 않아, 갑자기 대학교 학회 동기로부터 카톡이 왔다.

“내 군대 훈련소 동기 소개받지 않을래?“ 라며 사진과 함께.

그 남자가 먼저 내 사진을 보고 자기 스타일 이라며 소개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꽤 준수한 외모에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했다.


왜 이런 사람이 나를? 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는 그 사람이 실제로 나를 만나보고 거절한다고 해도 타격이 없을 정도로 어렸고, 심심했고, 외로웠다.

그는 토요일 저녁 6시에 청담에 위치한 한 레스토랑에서 나를 만나자고 했다.

직접 만나기 전까지 딱 필요한 말만 건네며 무심한듯 관심없는듯 차가운듯 한 말투가 굉장히 맘에 들었다.


복잡미묘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는 그 레스토랑 때문이었는데 전 남자친구와 500 일이 되던때,

한번도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데려가지 않는 그를 원망하며 내가 데려가 달라고 조르고 졸라 그가 날 위해 예약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돈쓰기 무서워하는 짠돌이 남자와 500일이나 만나서 겨우 갔던 곳에 새로운 남자를 만나서 소개팅을 하고 앉아있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청담에서 처음 본 그의 첫인상은 차가웠지만, 대화를 하다보니 그는 꽤 유쾌하고 여유로운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나는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그 여유로움에 어쩌면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돈 많은 사업가의 외동아들로 걱정없이 자란 사람이었고,

어렸을때 부터 여기저기 외국에서 살다가 대학은 영국에서 졸업한 나보다 한살 어린 연하남 이었다. 그 당시에는 한국에 들어와 통역관을 하고 있었던 때였다.


밥을 먹으면서 주변을 둘려보니 화려하고 예쁜 여자들이 너무 많아서 괜히 위축됐다.

‘저런 돈많고 잘난 유학생은 나같은 사람은 별로 안좋아할 것 같은데…그냥 될대로 대라, 편하게 밥이나 먹고 가자‘라는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다.


예상과는 다르게 이 남자는 만난 날부터 내가 본인의 이상형이라며 매우 적극적으로 들이댔다.

그리고 우리는 소개팅을 한 날부터 일주일간 매일 만났다.

그는 나에게 사귀기 전부터 애정표현을 서슴없이 했고, 자신이 키우는 개, 자신의 가족들, 친척들 얘기도 꺼리낌없이 하며 나와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리고 사귀자마자 온 집안 가족 및 친척들한테까지 내 사진을 보여주고 내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렇게 완전히 180도 바뀐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나간 사람의 잔상이 떠올라서 때때로 매우 힘들었던 것도 같다. 그 당시에 쓴 일기를 보자면 ‘너하고 있을때는 너무 행복하고 좋은데 집에갈때 걔 생각이 나면 너무 아프고 힘들다‘라는 미련 줄줄 떨어지는 내용이 종종 있다.




그는 사랑꾼이었고 매일매일 나에게 사랑한다 말해주며, 대부분의 여자들이 환장할 만한(?) 연락 속도를 가졌었다.

자신의 일상을 시시콜콜 실시간으로 말해주고, 현재 있는 위치와 만나는 친구들, 먹는 음식, 그리고 내가 보고싶다는 말과 같은 애정표현까지 더불어 나의 하루를 빼곡히 그의 연락으로 채워주었다.

그는 참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고, 사랑과 관심을 많이 받고 자라서인지 타인에게도 그걸 계산없이 듬뿍 줄수 있는 사람이었다.

특히 내가 배울점이 많았던 부분은 ‘자존심 부리지 않는 그만의 사랑표현 방식’ 이었다.


그는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항상 사랑한다고 먼저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보고싶다고 말하지 않고, 귀찮음에 자주 보려고 하지 않아도 항상 먼저 찾아와서 같이 있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사랑한다는 표현이 어색한 나머지 그가 사랑한다고 하는 고백에 매일 대답을 해주지 못하는 나였다. 그럴때마다 그는 항상 삐진 표정으로 투정을 부리곤 했던것 같은데

그렇게 투정을 부릴 수 있다는 점이 부러웠던것 같다.

입장을 반대로 바꿔서 생각해보면, 만약 나는 내 남자친구가 나의 지속된 표현과 고백에 답을 그만큼 해주지 못한다면 삐지고 투정부리는 것이 아니라

혼자 몇일이고 몇달이고 참다가 헤어짐을 고했을 것이다.

나는 사랑앞에 같잖은 자존심을 부리고, 조금 덜 좋아하는 척해야 이긴다고 생각하는 못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제대로 말도 못하고 끙끙 앓다가 결국 파국이 되어서야 손을 놓아버리고 마는 내 성격에 비해 그는 천진난만하고 순수하고 솔직하고 유연했다.


그리고, 항상 건어물처럼 데이트 내내 집에 엎어져있는 나를 항상 밖에 불러내어 좋은 경험을 많이 시켜줬다.

딱히 어딜가서 무얼 하고싶다는 생각이 없는 나에 비해, 그는 항상 활동적이고 긍정적이고 힘이 넘쳤다.

그래서 그와 함께했던 시절에 사진들은 오색빛깔 찬란하다. 서울 이곳 저곳, 거리 거리를 쏘다니며 신기한 경험을 하고 예쁘고 좋은 곳을 많이 다녔다.


하지만 장점이 참 많은 그가 힘들었던 첫번째 이유는 그의 까다로운 식성과 취향때문이었다.


그리고 인스타를 정말 열심히 하고 인스타에 올라온 분위기 좋은 ‘핫한’곳을 가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라 데이트 장소도 보통 그런 곳을 택했다.

데이트를 할때 식당을 고를때면 매번 한시간씩 걸리고 - 영하 20도의 날씨에도 변함없었다-

줄을 많이 서거나 가기 어려운 곳에 있어도 그의 인스타를 위해서 가줄때가 많았다.

또한 안먹는 음식도 많았는데 그 안먹는 음식 안에는 ‘여자친구가 만든 음식’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원데이클래스나 베이킹클래스에 참석해서 그를 주려고 만든 빵이나 디저트들을 나혼자 다 먹어치운적도 있었다.


그는 옷을 살때면 최소 같은 옷을 10 번을 입어보는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전혀 차이가 없어 보이는 미묘한 디테일들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옷을 사고 산 옷에도 수선을 굉장히 세심하게 해서 입고 다녔고,

그가 쓰는 안경도 굉장히 고가였는데 나름대로의 세부적인 미의 기준이 있었다 - 나같은 사람은 절대 알수가 없는-

그래서 그의 기준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그는 누군가의 말을 듣지 못했다. 자신의 말을 하느라 내 얘기를 들어 줄 시간이 없었고, 항상 무언가 모를 자신감에 차 있었다.

어렸을때부터 곱게 사랑만 받고 자란 사람들은 다 저러나.

내 인생과 생각이 전혀 전달되지도 이해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하는 느낌이었다. 함께있으면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했다.

그의 중심은 그였고, 세상에 오직 자신밖에 없어보였다.

나를 너무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너무 사랑하는 스스로‘에게 취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느날은, 내가 대학교 친구들이랑 간만에 모교에 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교정을 걸으면서 나름 다양한 감정을 느꼈던 날이 있었는데,

속으로 ‘아 이걸 남자친구한테 빨리 말해주고, 같이 학교에 와서 내 학창시절 얘기도 하면서 얘기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그에게 전화를 하자마자

그는 1시간 내내 자기 얘기, 자기 불만을 토로하면서, 내 얘기는 듣는둥 마는둥 결국 다 본인 얘기로 끌고 간 적이 있었다.

공감을 원했던 게 아니라, 한번쯤은 내 얘기를 귀기울여 들어주길 원했었던 거였는데, 많이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또 한번은 이 친구와 나를 소개해준 주선자커플이랑 더블데이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밥과 술을 잘 먹고 음식점에서 나와서 집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깜깜한 밤에 신호등없는 4차선 횡단보도를 건너야 할 일이 생겼는데, 여자친구를 꼭 안고 같이 길을 건너는 주선자 커플과는 달리

이 남자는 자기 혼자 차가올까봐 앞으로 막 뛰어갔다.

나도 그를 뒤따라서 뛰어가긴 했지만, 그 뛰어가는 뒷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마음에 박혀있다.

그럴 때면 밤에 자기전, 나지막히 나를 향해 내뿜는 ’사랑해’라는 말이 하나하나 원소가 되어서 방안에 흩뿌려지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래서 미친년처럼 또 머리속으로 되감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십분이라도 바닥에 누워있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던 그 남자를 생각했다.

그 남자만의 가공되지 않은 거친 사랑표현 방식이 생각났다.

간간히 마주칠때 마다 나를 죽고싶게 만드는,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그가 나에게 가진 견딜수 없이 무서운 힘에 대해 생각했다.


새롭게 나에게 다가운 이 남자가 나에게 준 행복, 그러나 그것을 누리기 위해 응당 지불해야할 현재와 미래의 상처와 아픔, 막막함 까지 생각했다.

건강한 너와 불안한 나를 잇는 살엄음같이 한없이 약하고 얇은 우리의 유대관계에 관해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끈을 놓고 다시 달려나갈수 있을 것 같은 너와,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나를 바라본다.




그와의 헤어짐은 너무 순식간이었다. 나는 그를 더이상 견딜수 없을때까지 견디고 있었다.

그의 까다로움과 이기심에 대해서 아무런 불평도 불만도 하지 않은채, 싸울때면 언제나 곁다리만 건드리며, 문제의 본질을 내 속안에서 받아들인채 나혼자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그것이 턱끝까지 차올라 더이상 숨쉬기 힘들때 헤어지자는 말을 내뱉었다.

한 번 내뱉으니 내 결심히 더욱 확고히 섰다. 붙잡는 그에게 세번이고 다섯번이고 열번이고 말했다. 헤어지고 싶다고.

홧김에 한말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한말인지 그 당시엔 몰랐었지만, 뒤돌아보니 그건 널 더이상 견딜수 없다는 발악이었다.


그리고 헤어진 후에 나는 그 전남자친구한테 더 절박하게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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