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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평변호사 May 17. 2017

심각하지 않아서 좋다

일상의 변론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의 007을 보면, 제임스 본드가 갱단 두목의 배우자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배우자는 본드에게 말한다. "저 유부녀에요". 본드가 말한다. "유부녀는 심각하지 않아서 좋아요". 그렇게 본드와 갱단 두목의 배우자는 사랑을 나누고 몇일 후 그 배우자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심각(深刻)은 깊을 심에, 새길 각이 합쳐진 것으로 상태나 정도, 상황이 매우 깊고 중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임스 본드는 그 유부녀에게 왜 심각하지 않아서 좋다라는 대사를 했을까. 현재 본드의 감정은 단순한 호감이나 육체적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 책임감이나 상대에 대한 이해의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을까.


남녀간의 관계가 심각해 지는 것은, 서로가 자신의 영역 안으로 상대를 들이거나 자신이 상대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 표면에 보이는 것 이외에 다른 이면과 내면을 알게 되고 그것을 이해할 필요성과 그 당위성을 깨닫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관계의 단절 뒤에 다가오는 상처도 심각성을 더한다.


남녀가 얼마간 서로 즐기다가 관계가 단절된다는 것에 아무런 이의없이 동의를 한다면 '심각'해지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냉정한 합의의 균형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어느 일방은 합의를 넘어 상대를 사랑하게 된다.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관계에서 심각하지 않을 수 있으려면 기대가 없어야 한다. 기대를 품는 것, 그것이 보상이든, 단순한 피드백이든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는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다.


본드의 상대가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리자 제임스 본드가 '심각'하지 않아서 좋다라고 말한 이 대목에서 본드의 행위와 감정은 전부가 진심이 아님을 상대 유부녀가 알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본드의 지금부터의 말과 행동은 유희가 대부분이라는 점을 상대 유부녀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임스 본드가 이 일로 상대방을 책임져야 하거나 상대의 습관, 생각, 생활방식, 가치관 등을 알아가고 이를 자신의 그것들과 조화시켜야 하는 숙제를 반드시 해야만 했다면, 유부녀를 유혹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007 영화의 특성상 007의 성적 매력을 영화의 한 분량으로 채워야 하기 때문에 전체 스토리와 크게 관계없는 남녀관계의 장면을 삽입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제임스 본드의 경우처럼 사후 처리가 깔끔하게 되지는 않는다. 상대 배우자의 배우자에게 발각이 되어 복잡한 삼각분쟁을 겪거나, 어느 일방이 미련과 집착을 부릴 수도 있는 문제이다. 007에서는 그 유부녀가 갱단 두목인 남편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제임스 본드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한다. 서로 심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심각한 결말을 맞았다.


심각이라는 말은, 선뜻 부정적이고 다소 어두운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관계가 심각해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관계에 신중하려고 노력은 하더라도 심각에 빠지는 것은 세련된 모습을 유지하지 못 하는 것만 같다. 심각한 관계는 상대에게 부담을 주고, 자신에게 좌절감을 안겨다 줄 가능성이 높다.


관계에 있어 신중하되 심각해지지 않을 수 있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제임스 본드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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