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마누라. 배우자 중 여성을 뜻하는 말이다. 마주 누워 있는 여자라는 의미도 있고, '아내'를 허물없이 부르는 의미도 있고, 중년 여성을 낮추어 부르는 의미도 있다. 마누라라는 단어에 대해 선뜻 떠오르는 인식과 감정은 마누라의 반대 배우자마다 다르다.
언제부턴가, 어떤 이유로 마누라는 불편한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연애시기에는 생일, 100일, 각종 기념일에 대한 남자의 이벤트나 기억, 선물이 여성에게는 사랑의 척도인 듯 하다. 그런 날을 까먹거나 간과하고 지나치는 날에는 반드시 혹된 비난과 감사가 시작된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라는 추상적인 변명과 사과는 여성의 토라진 심경을 회복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연애단계를 넘어 결혼에 골인하는 순간, 기념일은 물론이거니와 돈봉투의 크기, 가사분담, 육아 등 현실적인 아젠다에 대해서도 비난과 감사의 범위가 넓혀진다. 이제는 사랑하는 영자씨가 아니라 그저 마누라가 된다. 마누라는 늘 남자, 남편을 감시하거나 실적과 성과를 평가하는 감독관과 같다.
마누라가 되어버린 소녀들!
마누라를 존경하고 아끼는 경처가, 마누라를 두려워하는 공처가, 마누라를 사랑하는 애처가. 이런 용어들은 사실 나의 아버지 세대때나 들었던 것들이고, 지금은 유통되지도 않는다. 아내, 여성인 배우자를 마누라로 부르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이다. 집사람, 아내. 이 정도가 통상적인 여성인 배우자에 대한 호칭이다. 여편네도 있는데, 그렇게 불렀다가는 싸움이 날 수 있다. 싸울 때 보통 "이 여편네"라고 했던 것 같다. 우리 아버지들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은 아줌마들이 원동력이었다는 설도 있다. 억척, 억순, 똑순이처럼 아끼고, 틈을 이용해 더 일하고, 그래서 이만큼 잘 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소녀의 긴 생머리는 일년동안 풀리지 않는 꽁꽁한 아줌마 퍼머로 그렇게 마누라가 되었다.
꿈이 있던 소녀는 마누라가 되어간다. 한 푼이라도 아끼고, 더 잘살으라고 애들을 닦달하고, 남편이 술값으로 한턱내는 행위에 대해 바가지를 긁어 가며 가계를 챙기는 중에 소녀는 마누라가 되어 버렸다. 물론, 아닌 여성들도 있지만.
때문에 마누라는 불편한 존재이다. 어떤 마누라는 하루가 24시간뿐인 것이 불만이라고 한다. 48시간이면 돈을 더 벌어올 수 있을텐데라고 말한다. 그 마누라의 남편이 불쌍하지만, 경제가 어렵고, 사는게 팍팍해지니 마누라들은 걱정이 앞서고 남편이 좀더 수확량을 거두기를 바란다. 마누라는 그래서 불편하다.
누군들 많은 돈을 벌고 싶지 않으랴!
사랑하는 여자와의 지속적인 섹스에 대한 희망의 대가치고는 그 멍에의 무게가 너무 크다. 누군들 마누라에게 많은 돈을 가져다 주고 싶지, 그 반대상황을 경험케 하고 싶지 않다. 사는 것이 녹녹하지 않다. 그리고, 그 강도는 점점 더 세어져만 간다.
마누라가 다시 아내로, 가능하면 연애시절의 그 소녀감성으로 회귀될 수 있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글렀다. 할 수 있는 최선은 더 많은 돈을 벌거나 마누라의 기피사항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세상에 마눌님들에게 변호하자면 가끔씩은 등을 다독거려줄 수 있는 여유를 부려주기를 바란다.
세상의 대부분의 남자들은 소년에서 노동자로 되었고, 그저 알코올에 마취되어야 숨을 쉴 수 있을 듯 하기 때문에 마누라의 기피사항인 리스트 1위, 또는 2위 사항을 늘 재범한다.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고, 설득력없는 넋두리일 수도 있다.
마누라의 심경을 건드리지 않는 TIP!
변호사로써 설득력있는 주장을 해야 하는데, 마누라를 기분좋게 하는 방법을 설명하려다가 일이 삼천포로 빠져 버렸다. 돈을 많이 벌어다 주면 좋겠지만, 사실은 남편이 소년이었듯, 아내도 소녀였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현실이라는 무게 때문에 서로가 하지 못 하는 말, 참고 내색하지 않는 감정들이 있다.
그저 그런 소소한 얘기들을 나누고, 들어 주고, 자신도 털어 놓고, 위로하는 것이 마누라의 심경을 건드리지 않고, 기분좋게 해 주는 TIP이라고 정리하고 싶다. 마누라들도 돈돈 하지만, 사실은 위로와 격려가 필요할 것이다. 그저 소소하게 들어주고, 소소하게 털어 놓고 그런 시간이나 상황이 소중한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