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수렵과 채취, 농경사회. 일련의 무리를 이루어 자급자족을 해야 하던 시대에는 직업이라고 분류할 만한 특징적인 기준이 없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자본주의 개념이 설립되면서 시장이라는 공간이 생겼고, 우리는 집안을 뛰쳐나와 시장으로 향해야 했다. 시장에서 우리는 분업화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으로 특징지워 진다.
직업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에는 모두가 '일'을 함께 나누어 해야 했기 때문에 모두가 같은 일을 하거나 같은 일의 일부를 했다. 때문에 하는 일로써 사람을 구분짓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엄연히 정의를 분명하게 내릴 수 있는 직업이 존재하고 직업은 곧 '나'를 설명하는 대부분의 개념요소가 되었다.
나는 연봉 6,000만원을 받는 은행원이다.
나는 때때로 일일이 일하여 일당 10만원을 받는 일용직이다.
나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을 파는 약사이다.
나는 남편이 일하고 집안일을 하며 아이들을 양육하는 현모양처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욕먹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국회의원이다.
기타 등등
'나'를 직업이라는 기준으로 정의짓고 설명하기 시작하면 저절로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소득수준이 노출되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계급의 어느 순위에 랭크하게 된다. 직업, 소득, 신분보장의 여부 등의 개념요소에 따라 '나'를 설명하게 되면, '나'는 부분별, 전체별 순위가 매겨진다.
상위소득 몇 %, 중위소득 몇 %, 하위소득 몇 % 등 소득규모와 자산상태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고 직업취득의 진입장벽의 고저에 따라 사회적 신분도 달라진다. 공인이냐, 사인이냐에 따라 신분보장도 달라진다. 다양한 직업은 다양성만큼 '나'를 정의하는데 주요요건이다.
직업의 귀천이 없으니, 하는 일에 만족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행복한 자아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유로운 생각이다. 세상은 그런 자유를 인정하는 듯 하지만 실제 평가는 그렇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고, 계급별, 계층별 노는 물이 다르다. 돌아서서 비웃거나 순위매김을 하는 것이 야박한 세상과 속인인 피아간의 진정한 모습니다.
직업에 대해 비록 생계를 유지하는 소득원천 이상의 의미를 애써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특정 직업에 속한 '나'에 대한 정의는 직업의 정의의 부분집합이 된다.
우리가 좋은 직장, 소득이 더 큰 직업을 추구하는 이유도 '나'에 대한 정의를 향상시키고자 하는데 본질이 있을 것이다. 직업, 주로 하는 일에 의해서 '나'는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외부의 시선에 의해 정의된다.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할 사람인가, 루즈한 관계로 유지할 사람인가는 '나'에 대한 타인의 정의에 의해 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