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과 분열
인간의 관계는 고차원으로 변천해 왔다. 태고적에는 1차원인 점, 2차원의 직선적 관계였다. 생활습속, 신화적 개념, 지능이 다소 높은 엘리트(군주, 왕, 제사장 등)의 등장에 의해 3차원으로 변했다. 4면체 피라미드형의 3차원이 역사에 있었고, 저항에 의해 8면체 마름모형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에는 버섯모양이 될 것으로 예측된다.
양극화는 생활용어가 되었고, 들어도 크게 거부감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대중은 일찌감치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바라볼 뿐, 어떻게 해 볼 수 있다거나 어떻게 해 볼 생각도 귀찮아졌다. 그만큼 피로감은 조화와 융화에 대한 노력을 고갈시켰고, 차라리 어느 한 쪽을 선택하거나 중간지점 어디쯤에 어중간하게 살아가는 것이 속 편하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권력, 부, 정보. 버섯처럼 엘리트에게 편중되어 몸체가 매우 빈약한 사회구조가 현재 생성 중이고, 미래 어느 시점에 버섯이 쓰러질 때까지 버섯 대가리 부위는 더 커질 것이다. 하나의 개체, 하나의 사회, 하나의 국가는 미명일뿐 연약하게 연결조차 되지 못 하는 순간, 버섯은 부러지거나 쓰러질 것이다. 엘리트들은 버섯대가리에 앉아 한 몫을 키울 생각 뿐이고, 대중이 소란스럽게 굴면 일부 떼어 양분을 아래로 흘려 보내준다. 포퓰리즘이다. 대중은 버섯대가리가 먹어 치우는 양분을 흙속에서 흡수에 계속 올려 보내야 하는데, 점점 그 일이 무의미하고 힘들게 느껴진다. 엘리트들은 대중이 그런 기세를 보이면 폭동과 선동을 방지하기 위해 막대한 여분 중 일부의 양분을 내려 보내 주거나 잠시 덜 쳐먹는다.
이미 국내외의 사회는 전통적 아젠다인 권력의 배분, 부의 분배, 정보의 투명한 공유 이외에 세대간의 분열, 사고의 편향이라는 추가된 낚시바늘에 걸려있다. 세대간 양극화도 크게 보면 사고적 편향에 포함시킬수 있겠다. 문제는 종교전쟁이 심각한 참극을 역사적 드라마로 신랄하게 높은 시청율을 기록하였듯, 사고의 편향은 가속도가 있고, 엄청난 크기의 중력을 가지고 있다. 한 사회, 세계적 사회에서 사고의 다양성을 관찰하기는 어렵고, 양극점을 중심으로 편향 중에 있어서 이해와 배려는 주머니에 넣은지 오래되었고, 적개심과 분노만이 확인되고 있다. 걱정은 그 편향의 속도와 중력의 크기가 가파르게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법에서 말하는 '실체적 진실'은 언제나 하나이다. 법적 영역 밖에서도 진실은 언제나 하나이다. 그런데, 사건과 현상의 진실이 두 개가 된다. 엘리트의 조작에 의해서나 인플루언서의 상업적 모략에 의해서나, 잘못 취합된 모자이크 정보에 의해서나 진실이 두 개가 되니 이를 가리는 것도 피로를, 어느 진실이 실체적 진실인지 함부러 믿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 걱정은 결국 대중이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반대진실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해 적개심과 분노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정도가 아니어도 반대진실에 의존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무시하거나 무식하다고 쉽게 단정해 버린다.
우리는 공정하고 투명하며 적개심이나 분노가 아닌 이해를 위한, 다름을 확인하기 위한 그런 소통의 채널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