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회전하는 시계바늘, 숫자가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하는 시계를 보면서 의심없이 공통적으로 "시간은 흐른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다!"라는 감정을 느낀다. 시계는 시간을 표시하는 발명품으로 오랜 세월 의심의 여지없이 시간의 유속을 정속으로 표현하는 인류 공통의 계약서가 되었다. 그런데 정작 시계가 작동한다고 해서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는 것은 과연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시계는, 시간이 좌에서 우로 향하는 화살표 방향,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진행다는 것을 전혀 표현하지 않음에도 시간이 "→" 방향성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 흐른다고 지각하고 의도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관념에 의존할 뿐이다. 나아가 더욱 무서운 사실은 시계가 시간이 유속을 표현함으로써 종국에 다달아 인간에게 죽음을 알리는 징표가 된다는 점이다.
시계는 짧은 바늘이 '12 '를 두번 지나친다는 것을 표시할 뿐인데, 하루가 지났다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동의한 후 실천할 뿐인데, 하루가 흘렀다고 판단한다. 과연 어제와 오늘은 단절되고 명백한 구분을 통해 구별되는 것인가. 물론, 마치 금요일과 토요일에 우리가 행하는 행위와 정신적, 감정적 긴장과 이완처럼 계획되고 의도된 내용에 따라 행동양식과 사고양식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속한 부분적 세계와 그 세계가 속한 전체적 세계, 미시적인 내적 감응과 신체적 변화가 하루만에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계는 정해진 반복적 표현만으로 인간에게 노화와 죽음의 문턱에 한걸음씩 내걷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시계는 발명품에 불과하므로 인간이 그것에 그렇게 의미를 부여한 결과일 뿐이지만 말이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하게 적용되어 왔다.
'시간을 아껴써야 한다'라고 했을 때, 시간을 절약한다는 것은 주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증가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시간에 대해 양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지극히 무의미한데, 시간은 시계에 의해 절대적 양이 이미 정해져 불변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절약한다는 것은 오로지 어떤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행위를 할 수 있는 선택적 전환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회적, 개인적 의미에서 시간의 절약, 즉, 어떤 행위를 덜 하거나 의도적으로 하지 않음으로써 그를 통해 발생하는 여백 중간에 어떤 행위를 더하거나 의도적으로 하게 만들어 감정적 가치를 부여하고 세속적 기준에 의해 결과물(부의 증가, 지위의 상승, 자격증의 취득 등)을 취득하게 될 때 인생이 의미있어진다고 느끼게 되는 무의미한 자각 때문에 시간의 절약 개념과 경고가 대대손손 이어지고 있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시간의 여백을, 망상으로 채우고 스팸메일, SNS, 광고영상, 잡담으로 채우는 낭비를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고 배운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발전적 행위로 채워야 한다는 충고를 배운다. 시계에서 시간을 늘리거나 줄일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하거나 이를 까맣게 망각하고 시간을 이렇게 저렇게 사용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조언은 무색하고 무의한 것인데, 우리는 전혀 동의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시계를 자주 들여다 보면서 시간을 아낀다는 강한 감정적 압박 하에 가급적 많은 유의미한 행위를 채워 넣으려고 노력한다. 피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너무나 많은 계획과 의도가 전부 충족되지 않은 채 일부만 채워지다가 꺼져버리는 오늘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시간이 미래로 연결되어 가다 보면 과거보다는 나은 시간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 한다. 아무쪼록 시간을 다이어트해서 흘려보내는 것이 안도와 위안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삶 전체를 두고 의미를 파악해야지 특정 시간대를 특정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