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원죄로부터 시작된 것이 노동이다. 창세기 3장 17절~19절에 보면 말씀이 아래와 같이 되어 있다.
최초의 여자가 열매(선악과)를 따고 최초의 남자가 이를 삼켜 맛본 것이 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여 인간의 한계를 망각하고 유한성을 초과하여 신과 동일해지려 한 것이 원죄의 근본이다. 성경에 기록된 바 최초의 남자가 땀흘려 노동해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먹을 것을 염려하는 인간의 관념은 최초의 남자 때문이고 구별없이 모두가 노동을 하도록 운명지워졌다.
역사상 농경시대가 창세 후 범죄발생 즉후에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구심이 들긴 하지만, 수렵과 채취의 시대에 노동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모두 수렵하고 모두 식물을 수집하여 이를 기뻐하며 가무로 하늘에 감사했다. 노동의 관념은 노동하지 않는 일부가 노동의 과실을 먹기 위해 의도적으로 발명된 것이다.
노동하지 않는 일부는 물리력, 보다 나은 지적 상상력, 기만 수준의 어휘구사력 따위로 노동하는 대부분에 대해 노동이 신성한 것이라고 알려준 뒤 노동하지 않는 일부의 그러한 상태를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 것이 노동의 역사다.
신성은 반복적이고 지나친 노동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열매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노동이 어떤 식으로 발휘되든 열매를 추가로 요구하지 않는 것이 노동없이 열매를 취하는 일부에 의해 노동에 대해 신성이 부여되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필연성은 원죄로 발생하였기에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만, 원죄의 내용이 '땀'에 있고 '땀' 없이는 먹을 수 없으니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노동하는 대부분이 노동하지 않는 일부의 상황에 대해 인식을 거쳐 제한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 되자 노동은 신성성을 상실하고 부당성을 함유하게 되었다. 부당에 이르지 않더라도 최소한 억울하나 마지 못해 하지 않을 수 없는 행위가 되었다.
노동은 동일한 신체 부위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사고력 중 일부만을 반복 사용하는 것인데, 일부만 사용하더라도 신체의 전부, 정신의 전부가 피로해진다. 한정된 시간도 노동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으로 구분된다.
노동은 결코 신성하지 않다. 값을 치러 먹을 것을 구하는 일련의 수감생활이다. 노동은 그야말로 가능하면 하고 싶지 않은 것일 뿐 그것에 어떤 기쁨이나 교훈이 내재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사람들은 가급적 노동을 멀리하더라도 먹을 것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섰고, 그 결과 해답의 열쇠를 찾지 못 한 사람들만이 여전히 노동하고 있다. 노동은 X같은 것일 뿐 결코 신성하지 않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어보면 "그렇다"라고 긍정해야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다"이기 때문에 노동에 대한 기피는 벗어날 수 없는 멍에이고, 노동의 시작 전 우울, 노동 중의 고단, 노동 후의 허무가 계속해서 이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