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누구도 부정하지 못 할 확실한 사실, 진실 중 하나는, "나는 완벽하지 못 하고, 완벽할 수 없으며, 내가 믿는 것이 가급적 진리이길 바라는 소망과 한계를 느끼는 존재"라는 것이다.
살아온 시간, 축적된 경험, 의도적으로 구축한 지식과 사고체계에 기인한 내가 믿는 진리는 마찬가지인 타인의 그것에 의해 갈등을 빚게 된다. 내가 믿는 진리에 대체로 공감하는 척 하는 타인이 비교적 다수일 때, 내가 믿는 진리가 진정한 진리에 근접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나아가 두려운 점은 내가 믿는 진리에 대척점에 있는 타인이 믿는 진리에 대해 그것을 포기하거나 단념하거나 대폭 수정할 것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강요와 폭력의 힘이 대등할 경우, 사소한 갈등과 마찰에서 대량의 폭력으로 발전하게 된다. 정쟁과 전쟁, 크고 작은 소요와 혼동은 내가 믿는 진리가 전적으로 진리라는 내적 확신이 확고하고 공고해져 더 이상 덜어낼 수 있는 요소가 남아 있지 않을 때 결코 종식되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믿는 진리, 내적 확신은 전적으로 '나'라고 하는 단일 개인에게만 옳을 뿐이다. 설령 내가 믿는 진리에 대체로 공감하는 척 하는 타인들이 다수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나의 믿음과 내적 확신에 100% 공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믿는 진리와 확신이라는 것이 고작 80억분의 1에 불과할 뿐인데, 공감의 정도를 넘어 수용을 강요하고 동화를 강조하는 것은 지나치게 이기적이거나 지나치게 폭력적인 것이다.
우리가 일부 다수와는 대화가 순조롭다고 착각하고, 일부 다수와는 전혀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치부하는 것은 머리 속에 내가 믿는 진리와 확신으로 가득차 타인이 믿는 진리와 확신에 대해 알아볼 시간과 기회를 가질 유휴 메모리가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문명이라는 기준에서 고도로 발전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는 이 순간, 갈등이 양극으로 치닫는 이유는 사고의 다이어트라는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못 할 뿐더러 그러한 노력조차 굴복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조건없는 다양한 시점을 갖는 것이 승리이지 왜 그것이 굴종이 되겠는가. 세련되고 유연한 사고의 다이어트를 통해 머리에 수용공간을 늘려 텅빈 머리를 가진 사람이 더 고도로 발전된 인격임에도 기호에 들어맞는 단편적인 지식과 지엽적 세계관으로 가득차 나름의 논리를 체계적으로 구축해 설파하는 인격이 도대체 어떤 발전가능성이 있겠으며, 사회에 얼마나 이바지할 수 있겠는가.
보아하니 글 꽤나 읽었다고 하는 자칭 지적 엘리트들이야말로 뇌량(뇌의 좌우반구를 연결하는 다리)이 단절된 반푼이일 뿐이다. 파란색이면 어떻고, 빨간색이면 어떤가. A매치를 해야 하는데, 자신의 내적 진리에 공감하는 척 하는 선수만 기용할 것인가. 이길 수만 있다면 스스로 옳다고 믿는 타인조차 실력을 기준으로 선수로 발탁할 뿐이다.
갈등과 분격이 세계적 추세인 것으로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녹색지대는 양극에서 발산되는 열광에 의해 말라버린 것 같다. 우리의 의무와 책무는 타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그 스스로를 발전시켜 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