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평변호사
촛불집회는, 촛불이 가지는 여러 가지 의미를 통해 국민 또는 일정한 집단의 의사표현의 한 장르가 되었다. 염원, 희생, 기다림 등 촛불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키워드이다.
각종 외신은 물론, 지인들까지 촛불집회를 두고 상당히 놀라는 분위기다. 평화적 시위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촛불집회의 질서정연함과 비폭력성을 두고 놀라움을 금치 못 하는 것이다.
# 촛불집회의 성숙성
과거에 비해 촛불집회는 집회와 시위의 의미를 달리 써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성장하였고, 집결된 의사표시를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외부로 표시하는 것은 그 의사표시의 대상과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는 생각에서 절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촛불집회가 이토록 정연하고 성숙하게 된 것을 두고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일이다. 매 정권마다 게이트와 비리, 국가적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집회가 정례성을 가지게 되었고, 그 반복성 때문에 현재와 같은 수준에 이른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청렴하고 국민에게 고통울 주지 않았다면 촛불집회는 열릴 필요성이 없었다. 촛불집회가 개최되고 국민들을 힘겹게 집결토록 만드는 저급한 정치수준, 부패와 부정이 촛불이 꺼질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 촛불집회의 저항성
하나의 촛불은 바람이라도 불어들면 금새 빛을 잃어버리가 십상이다. 하지만 수많은 촛불은 강풍에 휩쓸린다고 하더라도 남은 촛불이 꺼진 촛불을 다시 밝힐 수 있다.
국민의 의사와 뜻을 일시적으로 전부를 강압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남은 불씨가 꺼진 불씨를 되살리듯 국민의 정체를 송두리째 말살할 수는 없다.
왜 우리가 분노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지, 분노의 표출을 위해 집단적 행동을 하였다고 해서 그 부차적인 폭력사태, 교통체증 등을 염려할 일이 아니다.
국민이 저항하고 분노하는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고, 수인의 한계를 넘었기 때문이다.
# 촛불집회의 집단성
촛불집단의 규모에 대해 어느 순간부터 수치적 데이터로 환산되기 시작했다. 단위 평수 대비 인구밀도를 따져 보았을 때 이전 집회의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집권당, 집권세력, 집정자 등도 지지율, 투표율을 따진다. 그 수치적 데이터만큼이 민주적 정당성의 크기이기 때문이다.
집회의 크기는 얼마나 많은 인원이 집결하였는지의 집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분노의 크기이자 염원의 밀도이다.
우리 국민들처럼 다이나믹하고 저마다의 의견을 다양하게 가지고 있는 민족이 또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집합해 같은 생각을 표하고 있다면, 개인적인 감정과 사고가 동일하게 집단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는 것에 저마다 동의하고 그 의미가 전달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 촛불집회의 지속성
미래에는 촛불집회가 열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만큼 분노할 일이 없기를 바라고, 모두가 겪어야만 하는 고통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도 사람이 만들었고 그 운영도 사람이 한다. 국가가 청렴해도 천재지변, 외세의 침략 등 대외적인 요인에 의해 고통이 발생할 수 있다. 공분을 불러일으킬 요인들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아니어도 촛불집회는 우리의 자녀들이, 또 그 자녀들에 의해 연속될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수정할 수는 없다. 다만, 과거의 잘못과 꼭 같은 잘못은 최대한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미래에 더 좋은 것들을 추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축하와 감사를 기리기 위해 촛불집회가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행복한 상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