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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연상 Jun 27. 2023

이기적 삶의 현실주의가 실력인 것일까?

코치가 된 은퇴 CEO : 은퇴 CEO 인생에세이 (7)


어느 날 친구 A가 나에게 ‘역사는 먼저 저지르는 자의 것인가’ 라는 명제의 고민을 들고 왔다. 그는 내가 코칭 활동을 하는 걸 알고 찾아와서, 긴 시간 동안 자신의 한이 서린 긴 얘기를 털어 놓았다.




애초에 공적인 관계를 사적인 것과 섞는 것을 해서는 안 되었다.


친구 A가 COO 사장으로 있던 회사에 A와 동갑내기인 부사장 B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회사는 외국법인이 대주주인 대기업이다. B는 평소 사교 범위가 넓어서 그가 사회 생활에서 사귄 지인들 중에 A의 학교 친구들이 꽤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B는 A에게 유독 친근감을 표시하며 거리를 좁혀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B가 회사일로 이런 저런 얘기하던 중 A에게 ‘우리 동갑이고 친구들도 겹치니 그냥 편하게 친구를 하자’는 제안을 했다. A는 이 제안 자체가 좀 엉뚱한 제안이라고 생각했다한다. A 생각에는 상식선에서 개인적인 관계를 떠나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업무 상에서의 관계는 명확하게 사장과 부사장이라는 상하관계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실무자일 때는 수평적인 관계로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만 임원이 되고 점점 책임을 지는 위치가 될수록 수평적인 관계를 떠나서 오히려 수직적인 관계에서 이뤄지는 책임의 이슈들이 존재하고, 결국 각자 자리에서 져야 하는 책임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업무를 위해서도 둘 사이에 필요한 공식적인 선이 필요한데, A가 볼 때는 그 선을 넘는 제안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여튼, A는 순간적으로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이해하는데 당황스러웠긴 했다고 한다. 다만, 생각해보니 나이에 비해 일찍 사장이 된 자신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신은 자유로운 사고를 소중한 덕목으로 지켜 오던 사람이니, 어차피 자신이 사장임은 변한 없는 사실이고, 자신의 친구를 공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B의 제안에 너그러운 수용을 하는 것이 더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뭐, 당시에는 호칭이 무슨 중요한 일이겠냐고 생각했다고 하는데…실제로는 A가 B의 제안을 자신의 너그러움으로 수용하는 바람에 A 자신은 그 이후에 계속 불편하고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되었다.


B는 영악하게 똑똑한 사람이다.


서로 친구 사이가 되기로 한 뒤, 실제로 업무를 할 때도 공사구분의 경계가 허물어 지기도 했다. A 본인은 친구라는 명목하에 공과 사의 구분이 애매해지는 부분들이 생기면서 B에게 거북스러운 감정을 느끼기도 했으나, B는 영리하게 A가 지속적으로 불편하게 여기는 상황을 피해 나갔다. 분명 둘의 직급이나 역할 차이가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A도, B도, 서로 최고 실권자인 고용 CEO 회장을 같이 모시고 있는 상황이라, 사장과 부사장이라는 자리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A는 회사 내 비상한 상황에 휩싸여 CEO 회장과 함께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B가 사장이 되었는데, 들리는 소문에는 B는 A를 내보내도록 외국 대주주가 파견한 외국인 CEO가 결정하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사실, 모든 정황상 단지 소문이 아닐 것이라는 감은 왔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고 지난 일인데, 남아있는 후배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이유를 못 찾았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터질듯이 답답했는데, 우리 사이에서는 보살이라고 불릴 정도의 친구가 A였기에 어찌 보면 그 다운 행동이기는 했다. 당시 A는 어차피 이 또한 나의 운명이고 그동안 운이 좋았으니 감내하자는 마음으로 굳이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들춰내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A와 B 사이에 ‘친구’라는 관계의 의미가 같지 않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A는 국내 유수 중견기업의 CEO 사장, 부회장으로 자신만의 길을 새롭게 구축해나갔고, B는 원래 회사의 COO 사장으로 일하며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며 나이가 들어갔다. 그 동안 B는 자신이 여러 소문에 둘러싸인 부정적인 이미지 쇄신을 위해, 남아있는 후배들에게 평판이 긍정적인 A에게 친근감을 보이면서 개인적으로 여러 만남을 주선했다고 한다. A는 이미 그때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기로 해서 넘어갔고 이미 사건 이후로도 꽤 세월이 흘렀고 구태여 날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B의 수고를 받아 들여 만남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고 한다.

그리고 더 세월이 지나, 드디어 B도 그 회사에서 퇴임하여 둘은 임원 동우회라는 곳에서 다시 합류하였다. 세대차가 제법 나는 전임 회장이 다음 회장으로 최근 퇴임한 B를 택하여 추대 형식으로 지명하였다. A에게도 기회가 있었으나 B가 하고 싶어함을 알고 있는데다가, 근래 B가 자신에게 보여온 관계 회복의 노력으로 보아 굳이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B의 지명을 지지하였다. A는 그렇게 쉽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동우회 사무실 개조 과정에서 불거졌다. B는 A에게 어떤 식이 좋겠느냐고 조언도 구하고, 동우회 소속 전체 퇴임 임원들이 새로운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보자고 의기투합하는 아이디어에 적극 호응하는 듯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바뀐 사무실의 모습은 회장실이라고 꾸며진 독립 방 하나만 생겼다. B가 외부에 있던 개인 임대 사무실을 해약하고 이 방을 자신의 사무실로 만든 것이다.

이후, 마치 B가 실권을 쥔 회장으로 선후배 임원들은 일반 사무실 공간에 정기 모임이 있는 날 모여서 회의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B가 오너이고 다른 임원들은 회사에 근무하는 피고용인 같은 모양새가 되었고 불만의 소리들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A는 B가 자신과 같은 인생철학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었었.


A는 친구니까 B가 옳은 길로 다시 정리할 수 있도록 자신이 조언해야겠다는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상황에 대해서 A는 B와 별도로 만나 문제점을 지적하고 타협책을 제안하였다. 회장실이 아니고 큰 테이블로 교체하여 카페에서 수시로 개인적으로 컴퓨터를 놓고 일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가구를 바꾸어 모두가 공유하는 공간의 컨셉을 살려보면, 이번 개조 과정에서 생긴 동우회 소속원들의 불편한 분위기를 해소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B의 반응은 조언에 대한 검토나 감사 보다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렇게 할 수 없고 현안대로 자신의 개인 사무실로 써야겠다는 자신의 사적 이익을 고집하였다고 한다. B의 엉큼한 속셈에 충격을 받았지만, A는 B가 생각을 고쳐 먹도록 설득하기 위해 거듭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현명한 방향을 같이 고민해보자며 내가 돕겠다며 다양한 제안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B는 계속 현안 유지를 하겠다며, 결국 A의 말을 무시했다고 한다.




이기적 삶의 현실주의가 실력인 것일까?


B가 사전에 의논 했던 것과는 달리 급속히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저질러 버리고, 그 이유가 결국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함이었다는 것에 A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역사란 집행 실무 권한자가 저질러 버리면 그 자의 것이 되어 버리는가? 그렇다면 정의라는 대의는 과연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 존재인가?’ 그런 현타(?)들이 오면서, A는 자신이 살아오는 동안 굳건히 믿고 지켜왔던 신념이 무너지는 기분까지 느꼈다고 한다.

‘이기적 현실주의가 인간 삶의 실력인가?’라고 나에게 질문하더니 답을 망설이는 나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실 이런 모습은 평소 정치 경제 사회 여러 곳에서 흔히 보고 있어서 이 사회, 이 나라, 더 크게는 인류 삶을 어떻게 품격있고 소위 아레테를 구하여야 하는가 생각하여 왔지만 A가 자신과 직접 관련된 소소한 실생활에서 이런 모습에 처하게 되면서, 갑자기 자신의 삶에 직접적으로 찾아온 이 모순의 순간들을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하는가 지금도 고민된다’ 라는 말을 했다.

‘이기적 현실주의가 인간 삶의 실력인가?’라는 A의 질문에 내가 답을 망설인 이유는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고 싶지만, 마치 그것이 맞는 것 같은 상황이 생기는, 지금 A가 겪은 상황들이 실제로 꽤 발생되는 것들이라 내가 A의 기분에 단순히 동조해주는 듯한 피드백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A의 친구로서, 그가 고민하는 문제에 최대한 현명한 조력자가 되고 싶었으니까.


A의 마음이 내게 깊은 공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여튼, A의 어찌 보면 구질구질한 개인사를 들으면서, 그 동안 내가 가져왔던 ‘자신을 다스리는 정신 단련, 소위 높은 수준의 사유 지혜, 인간 존재의 문제를 고민한 철학 등에 대한 믿음’에 대해 다시금 되짚어 보게 되었다.

책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지혜라는 것이 “우리는 타인을 바꿀 수 없다” “내가 바꿀 수 있는 대상은 나 자신 뿐이니 나의 마음과 지혜를 높이는 자기 훈련을 하라” “타인에 대한 교정을 시도하려 하면 결국 자신을 다치게 한다” “상대도 고집을 피지만 속으로는 괴로워할 거다” “행복이란 남을 이기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기는 것에서 온다” “옳으냐 그러냐의 양자 선택이 아니고 큰 그릇의 마음으로 포용하는 중도의 힘을 가져야 한다” 것들이고, 지금까지 그 설득력을 크게 믿었었는데, A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가슴 한 켠이 답답해지면서, 갑자기 이 모든 가르침이 이솝 우회의 “신 포도”인가 싶은 회의가 든다.

꽤 오랜 시간 A의 길고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들었지만, 코칭을 바라며 찾아온 A에게 정작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원칙을 논하고 해결 방법을 같이 고민하기에 앞서, 이 일을 겪으며 A의 마음이 어땠을지, 그를 휘감고 있을 감정이 어떠할 지에 대한 고민이 더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내가 A의  마음에 공감하며 적은 시를 여기 붙여 본다.


(노연상 시)


누구는 마음을 거울같이
깨끗이 닦으면
정신이 맑아진다 했다

누구는 마음이 있다는 게 허상이니
애당초 마음이란 게 없는 줄 알면
닦고 말고 할 것도 없다 했다

욕심을 비우고 시기하지 않는다고
억울해 하지 않는다고
확신해도
그의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분명히 그 교활함이
드러났는데도
모두 눈 감고 떡 고물만 즐긴다

니체는 자신의 사유를
대중이 이해하지 못 해
정신병원으로 갔다


어떻게 해야 하나

비가 좀 더 세게 퍼 부었으면
좋겠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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