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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연상 Jul 13. 2023

자존심이야말로 인간 제일 밑바닥의 욕구 인가?

코치가 된 은퇴 CEO : 은퇴 CEO 인생에세이 (8)

오래전 젊은 시절, 회사에서 혼자 늦게까지 일 하다가 퇴근길에 저녁을 먹으러 근처 음식점을 들렀다.

옆 좌석에 지금의 내 나이쯤 되었을까 싶은 나이든 남자 두 사람이 도가니탕 한 그릇과 소주를 시켜 놓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첫 눈에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것 같다. 아마도 누군가 친한 사람과 술 한잔 거나하게 걸치며 따뜻함 정을 나누고 싶었으리라.


시간이 지나면서 그 두 사람은 취기가 오르는 것 같았고, 점점 서로 언성이 높아지며 자신의 고집을 늘어놓기 위해 상대 이야기의 헛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자신의 의견에 대한 자존심 다툼으로 바뀌어 갔다.

해 지는 저녁, 촉촉히 젖어오는 쓸쓸함을 삭히려 그리운 누군가와 만나 얼큰한 술 한잔하며 따뜻한 정을 나누고자 시작한 만남이었을텐데, 삭히려던 쓸쓸함 대신 씁쓸함을 얻으며 헤어진 그들을 보며 술 한잔 걸치지 않은 내 입맛 마저 씁쓸해졌던 것 같다.




자존심이란 인간 제일 밑바닥의 욕구인 것 같다.


그 날의 장면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나도 만났던 모습이다.

인간 관계에서 그것이 개인적 관계이던, 조직 내에서 상사 동료 부하간이던, 사회 지도자급의 지식인들간이던, 국가적 이슈에 대한 정당간이던, 심지어는 가족 구성원들간이던 자존심이란 인간 제일 밑바닥의 욕구인 것 같다.


왜 사람들은 힘들여 자존심과 그 외의 용어들 즉 자존감, 자부심, 자긍심, 존재감 등을 대비하여 사용해야 할까? 이 용어들이 자존심과 어떻게 다르며, 왜 자존심이란 단어로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지 우리는 수없이 들어 와서 알고 있다.

언어에 대한 학문적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체 왜 자존심은 비슷한 다른 단어들과 같이 쓰이지 못하냐는 단순한 의구심이다. 그리고 내 답은 그런 단어들 중 실제로 자존심의 힘이 가장 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존심은 인간이 원초적으로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가를 실감하게 하는 본성이다.


다른 단어들을 개념화하고 이해하고 자기 수련을 하였어도, 대화 도중 스트레스를 받거나 다급한 상황에서는 저절로 가장 먼저 가장 세게 나타나는 감정이 자존심이다. 이는 인간이 원초적으로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가를 실감하게 하는 본성이다.


로버트 그린은 자신의 저서 인간 본성의 법칙에서 그 종류를 18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그 모든 본성의 바탕에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 받고 싶어하는 마음, 자존심이 깔려 있다.


나에게 찾아오는 코칭 고객들이 들고 오는 이슈들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슈가 바로 소통이다. 조직 내에서,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 하는 상대를 답답해 하는 것이다.

논쟁이 점점 깊어지면 상대를 설득시켜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진다. 내가 상대에게 설득 당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다. 아마도 인간사 갈등의 대부분이 이런 모습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시중에는 온갖 대화법에 대한 책이 나와 있다. 어떤 미국인 저자의 책 중에 Difficult conversations: How to discuss what matters most 라는 제목이나 How to have impossible conversations 라는 제목이 있다. 대화란 difficult하거나 impossible하다는 것이다. 그 책에서는 그 이유가 모두 자존심에 상처 받을까 봐 저항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가 소통에서 문제를 겪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이론과 방법들을 익혀도 결정적 순간에는 자존심에 지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인간이 이 제일 밑바닥의 욕구에서 벗어나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


세상사 평상적인 사건들에서 초월하여 모든 욕구에서 벗어난 단계의 정신적 수련이 이루어 지면 가능하려나? 지구라는 땅에 발 딛고 사는 일상인으로 그렇게 하는게 가능하겠는가?

이 문제 때문에 역사상 다양한 지적 소유자들이 나타나 길을 제시하고 우리는 그들을 현자라고 부르며 따르고 있는 건 아닐까? 그 현자들도 해법을 직설적으로 나타낼 수가 없으니 알쏭달쏭한 말로 설명하고 있는 것 아닌가? 기독교의 우주 작동 원리로서 하나님 말씀이나 석가모니 불교의 공 무아 연기 설명이나 모두 그런 성격이지 않은가?


얼마전 아주 친한 친구들과 월례 행사로 모여 게임을 하던 중 그 날 따라 너무 운이 따라 주지 않는 것 같아 게임이 잘 풀리지 않아 스스로 바보 같은 느낌도 들고, 영 기분이 좋질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자신의 게임에 몰두하여 들떠 있었다.

나는 자존심이 상하는 느낌에 불쑥 성질이 돋아 고함을 질렀다. 평소 내가 나를 수련해 온 정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행동이었다.   

그 날 밤 집에 와서 뒤늦게 나를 돌아보며 친구들에게 아래의 문자를 써서 보냈다.



허물없이 특히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에게

오늘 밤길을 혼자 운전하며 돌아 오는 중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몇 자 적네.

아마도 내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글일 것도 같네.

나이 들어 가면서 어떤 경우던 감정에 휘둘려 경박한 언행을 하지 말자고 자기 훈련을 해 오고 있으나

오늘도 그러질 못하였네.

아마도 자네들과는 너무 허물이 없어 불알 친구 느낌이라 그렇게 된 것 같네.

그래도 평소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자기 훈련을 해 온 게 아무 소용이 없어져 버려 자괴감이 드네.

앞으로는 감정에 휘둘려 경박한 언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네.

이렇게 공개 선언을 하여 내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이 더 효과가 있기를 스스로 바라는 마음이네.   

좋은 밤 되시게~



나 답지 않은 행동을 보이고 후회했던 그 날 밤, 그 날 내게 다가온 '자존심'은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장 대면하기 제일 역겨운 인간 밑바닥의 욕구였고, 나를 자괴감에 빠지게 했었다.

동시에, 뒤늦게 나를 돌아보며 친구들에게 사과의 문자를 보낸 나의 건강한 '자존심'에게서 위안을 받게 해준 아이러니함이기도 했고, 스스로의 수련의 부족함을 깨닫게 해주기도 한 연약한 나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나름 오래 수련하며 살아왔거늘, 우주의 한 인간일뿐인 나의 밑바닥은 여전히 수련이 필요하다.




다음 회차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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