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 땅에서 시차를 즐기는 법
(1)
이번에 집을 나선 여정은 2월 한달로 보스턴 딸네에 와서 중간에 1주일 칸쿤을 다녀 오는 것이다.
인천 출발: 2026/2/02
보스턴 도착: 2026/2/02
보스턴 출발: 2026/2/14
칸쿤 도착: 2026/2/14
칸쿤 출발: 2026/2/21
보스턴 도착: 2026/2/21
보스턴 출발: 2026/2/26
인천 도착: 2026/2/27
(2)
칸쿤을 가는 것은 관광이 분명한데
보스턴에 온 것은 여행인가? 투어인가?
여행은 영어로 뭐라 하며, 투어는 한글로 뭐라 하나?
아무튼 5년전 보스턴에 유학 생활 체험이라는 목적으로 온 것과는 다르다.
그때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가방을 둘러메고 통학 기차를 타고 수업 시간에 맞추어 가야했지만
이번에는 그냥 서울 집을 떠나 보고 싶었던 손자 손녀들과 같이 생활을 즐기러 왔다.
여행도 투어도 아니다.
(3)
이런 일정으로 온 이국 땅에서의 시차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울 시간의 바이오 리듬이 저절로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저 졸리면 자고 깨면 일어나 있다.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가 깨우면 저녁 먹고 다시 잠 들다 보면 한밤중에 깨어 난다.
모두가 잠 들어 고요한 밤에 샤워도 하고 정신이 들어 책상에 앉는다.
일상의 시간에서 알아차리지 못한 생각들이 일어난다.
(4)
이런 황금 같은 시간에 나는 무얼하면 좋을까?
서울에서 가지고 온 책. 코칭 더 브레인, 그리고 카이스트 명상 수업을 다 읽었다.
작년 1년 한국불교 진흥원 산하 대원 아카데미에서 “나라고 생각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석가 붓다의 깨달음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내가 항상 이리 저리 살펴보던 명제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훑어볼 수 있는 훌륭한 기회였다.
가지고 온 두 책은 그런 주제에 대해 나의 생각과 일치하여 읽는 중에 많은 생각을 불러 주었다.
“나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찍은 과거의 사진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사지의 노예이다. 내 안에 들어있는 이 사지들은 가짜다. 실제를 사진 찍어 복사했으니 진짜 같지만, 그것은 그저 사진일 뿐 진짜가 아니다.” (카이스트 53쪽)
“뇌에 저장된 사진은 버려야 한다. 사진을 없앤다는 건 마음을 닦는 것이다. 사진이 없어지는 만큼 원래 내 안에 있던 진짜 내 모습을 찾게 된다.” (카이스트 57쪽)
· 이 부분은 내가 공부한 붓다의 깨달음과는 다른 점이 있다. 붓다는 진짜 나란 존재 자체도 없다 했다.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해 나온 사상이 ‘緣起’이다.
아마도 저자는 카이스트 학생들에게 마음 근력을 키우기 위한 명상을 설명하는 것에 중점이 있어 불교적 사유에 너무 깊게 들어가는 것을 피했을 것이다.
“우리는 운명의 주인은 나 자신이므로 모든 결정을 내가 통제하고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 감정, 의사 결정, 행동 대부분은 우리의 의식적인 통제하에 있지 않다. 뇌는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인지하는 현실을 창조하도록 우리의 주의를 잘 못된 방향으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달인이다.” (브레인 6쪽)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자로서 어디까지 우리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일까? 결정은 누가 하는가? 벤자민 리벳의 실험에 의하면 피실험자들은 손가락을 움직이기로 한 의식적인 결정을 하기 약 200 mili초 전, 그리고 손가락을 움직이기 0.5초 전에 뇌에서 운동준비 전위 신호가 먼저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실험은 뇌가 결정을 내리고 당신에게 알려주기 전까지는 의식적인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고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브레인 364쪽)
(5)
붓다는 『아나타락카나 숫타 (무아상경, SN 22.59)』에서 ‘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色(몸)은 나가 아니다.
受(느낌)는 나가 아니다.
相(인식)은 나가 아니다.
行(의도적 작용)은 나가 아니다.
識(의식)은 나가 아니다.”
이 다섯 가지를 모두 조사해보면,
“’참나’라고 할 만한 그 무엇도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그 통찰이 곧 ‘해탈(解脫)’의 지혜이다.
(6)
이국 땅에서 시차 때문에 한 밤중에 일어나 앉아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내가 그 동안 공부한 바를 바탕으로 찬찬히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내 나름의 시차를 즐기는 법이다.
(2026.2.04. 보스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