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오가는 사람들도, 하는 일도, 반복되는 일상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달려졌다는 것을.
부모님 댁에 들어서자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어머니는 뭐라도 주려고 분주하게 움직이셨고, 텔레비전에서는 눈에 익은 예능 프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뭔가 허전했다. 무심코 아버지가 머무셨던 방을 바라보았다. 주인을 잃은 돋보기안경, 성경 책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옷가지는 모두 사라졌다. 마치 그 자리가 원래부터 비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애써 아버지의 흔적을 찾으려 해도, 어느새 희미해지거나 지워진 흔적뿐이었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한 적조차 없었던 분 같았다. 사람이 떠난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잊히고, 사라지고, 결국 존재 자체마저 흐려지는...
우리가 오래전에 우리 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언젠가 우리도 누군가에게 잊힐 것이다. 삶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우리의 마지막이 실체 없이 사라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부친상을 치르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깨달았다. 마치 가슴 한쪽이 텅 비어버린 듯, 그 자리로 바람이 지나가고 그 바람을 잡으려 애써도 허공만 움켜쥘 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된다. 부모가 그랬다. 평소에는 무심했고, 때로는 원망의 대상으로 복잡한 감정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 상실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누구나 죽으면 한 줌의 재로 사라지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한 채 어떻게든 남들보다 더 잘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러나 끝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모두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지막 순간이 오면 어떨까. 지난 삶을 돌아볼 시간이라도 있을까. 설사 있다 해도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주어진 하루하루가 더욱 소중하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지금뿐이니까.
문제는 이 깨달음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쁜 일상에 치이면 곧 잊고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쁠 것이고, 또다시 많은 것들을 잊고 살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참으로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간다. 남겨진 사람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채우며, 떠난 이들의 흔적을 가슴 한구석에 남겨 놓은 채. 언젠가 우리 또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겠지만. 그래도 오늘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