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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n 17. 2022

종이책 읽기를 권함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최근 몇 달간 서사가 긴 소설과 씨름하고 있다. 복잡한 생각을 지울 요량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바쁜 일상에 주말의 무기력함까지 더해져 한없이 늘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몇 달째 이러고 있으니 나도 참 한심하다. 문제의 책은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 총 4권, 2412쪽 분량이다.


분량에 압도되어 한때 이제나 저제나 미뤄두고 있었다. 무엇보다 559명에 달하는 등장인물에 러시아인 특유의 이름의 혼란스러움까지 더해져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피예르만 해도 '표트르 키릴로비치(키릴리치) 베주호프, 키릴, 페탸, 페트루샤'로 불리고, 장면마다 이름이 다르게 등장한다.


러시아는 원래 이름을 다르게 부르는지 아니면 톨스토이만의 글 쓰는 방식인지 톨스토이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인물들의 이름에서 헤매다가 책을 덮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름을 기억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도표까지 그려가면서 읽었으니까. 고생 끝에 이제 마지막 권인 4권째를 읽고 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였다. 집에 공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방학을 맞아 집을 떠나 친척이 사는 낯선 동네 독서실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과 달리 그때는 독서실이 어둡고 좁았다. 혼자 그것도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독서실 한켠에서 꾸역꾸역 공부를 했다.


그때 나를 버티게 해 주었던 것이 책이었다. 공부하는데 책을 읽는 건 당연하다고? 교과서가 아니고, '소설' 책이다. 공부하다가 지칠 때 틈틈이 읽었던 책이 펄 벅의 <대지>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었다. <대지>도 서사가 길고 장대한 스토리가 특징인 대하소설이다. 물론 서사가 긴 만큼 인물 또한 많이 등장한다. 그래도 이번에 읽었던 <전쟁과 평화>만큼은 아니었다.


유난히 더웠던 그 여름, 나는 2권으로 된 <대지>와 <죄와 벌>을 다 읽었다. 공부가 잘 안 되면 그냥 잠깐 나가서 동네나 어슬렁거릴걸,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무모했다. 한 번 책상에 앉으면 공부가 안돼도 오래 버텨야 한다는 이상한 신념이 나를 지배하던 때였다. 대학에 들어가 사법시험을 준비할 때도 그때 들었던 습성이 비슷하게 이어진 걸 보면, 습관이란 참 무서운 거다.


아마 그 책들이 없었다면 독서실의 침침한 분위기와 혼자 떨어져 공부하느라 외로웠던 나 자신을 견디기 어려웠으리라. 문득 그때가 떠오르면서 '그래, 톨스토이의 책을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그러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이 소설 또한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권' 중에 들어가니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죽기 전에 한 번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한편 이 책을 읽게 된 데는 또 다른 사연이 있다. 대학 4학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백수처럼 빈둥거릴 때였다. 같이 합격한 같은 과 친구가 도서관에서 나오면서 이 책을 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합격자 발표를 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전쟁과 평화? 너 제정신이니. 또 책을 읽어. 책 지겹지 않아?' 하는 심정으로 핀잔을 주려다가 그 친구에게 오히려 한 말 들었다. "이런 책을 읽어줘야 해. 왜 이 책이 고전이겠니? 톨스토이가 뭐라고 썼는지 궁금하지 않아?"


나는 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심정적으로는 여전히 동의하지 못한 채 구시렁거리고 말았지만, 결국 입속에서 맴돌 뿐, 그 순간 나는 무척 부끄러웠다. 갑자기 고등학생일 때 틈틈이 읽었던 책에 그 친구의 말까지 떠올라 무모해 보이는 이 책에 도전하게 된 거다. 그 친구는 벌써 30년 전에 그 책을 읽었는데, 나는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이제야 읽고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힘든 일이 있거나 마음이 복잡할 때, 어떻게 그 상황을 넘겨야 할까? 각자 나름의 노하우가 있겠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다만 책을 읽으면 잠시나마 시름을 덜 수 있다는 정도만을 깨달았을 뿐이다. 혹시 나처럼 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다면 책 읽기를 권한다. 다만 너무 어렵거나 무거운 책보다는 스토리가 있는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감당하기 어려운 책은 오히려 나를 더 수렁에 빠뜨릴 수 있으니까.


책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이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주인공의 심정으로 다른 삶을 살아보는 거다. 애절한 사랑을 하거나, 가슴 아픈 이별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사랑에 성공해서 연인과 아름답고 멋지게 살아 볼 수도 있다. 현실 도피 아니냐고?


맞다. 가끔은 그런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 가혹하고 무심한 세상은 우리에게 그렇게라도 자기 최면을 걸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살 수 없게 만드니까. 누구한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정신 건강에도 그리 나쁘지 않다. 김무곤 교수 역시 그의 책 <종이책 읽기를 권함>에서 이렇게 말한다.


"책 읽기를 통해 우리는 타자를 만난다.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독서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가장 특별한 혜택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살면서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과 자기가 살아가는 시대, 그리고 자기가 몸담은 계층의 벽과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자기와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러나 책은 인간에게 주어진 공간과 시간의 벽을 넘어 수많은 인간 유형을 만나게 해 준다." (67쪽)




우리는 모두 한 개의 삶만을 산다. 그 지겨운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상상 속에서라도 나와 다른 삶을 사는 방법을 찾아보는 거다. 그게 바로 책을 읽는 거다. 물론 영화나 연극, 오페라를 보면서 주인공처럼 사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상력을 좀 더 발휘하려면 종이책만 한 것이 없다. 영화는 영상을 통해 감독과 배우의 시선에 갇힐 수 있지만, 책은 그 시선마저도 극복해 버린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갇혀 있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다양한 삶을 경험할 수 있는 거다. 다시 살고, 지금과는 다르게 살며, 새롭게 살 수도 있다. 유한한 삶을 사는 우리가 잠시 영원을 경험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순간이다.


책을 쓴 작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사유하다 보면 어느새 나의 고민이나 내가 처한 어려운 상황이 별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책의 효용은 많이 있지만,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앞서갔던 사람들이 우리에게 남긴 뜻깊은 유산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오늘 인용한 톨스토이의 글처럼 삶은 깨달음에 있다. 그게 무엇이든, 언제든지 우리에게 여전히 희망이 있는 것은 그 깨달음의 연장선에 우리 삶이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나저나 톨스토이의 저 책을 마저 읽어야 하는데 또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저 책을 다 읽어도 읽고 싶은 다른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언제 읽으려고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 오늘 못 읽으면 내일 읽으면 되지, 이 글을 쓰는 시간, 시간은 벌써 밤 11시를 넘어가고 있다.

"피예르는 포로로 수용되어 지내는 동안 인간이란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며 그 행복은 자신 안에, 즉 자연스러운 인간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불행은 부족보다 과잉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이성이 아닌 자기 전 존재, 자기 삶을 통해 깨달았다. 그는 이 세상에 인간이 행복하고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상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부자연스러운 상태도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는 고통에도 한계가 있고, 자유에도 한계가 존재하며, 이 한계가 매우 근접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장미 침상에서 꽃잎이 한 개 떨어졌다고 고민하는 사람이나, 지금 축축한 땅에 누워 한쪽 옆구리는 따뜻하고 다른 한쪽은 차가워서 고민하는 피예르나 고민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톨스토이 _ 전쟁과 평화, 4권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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