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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이 흐려질 때

by 서영수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눈앞이 흐려진다고 해서 세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다만 또렷이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어쩌면 지금의 답답함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모든 것을 시계 제로로 만드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내가 서 있는 자리의 윤곽만 잠시 흐려졌을 뿐인지도 모른다.


답답한 마음에 동네를 걸었다. 추위가 풀려서인지, 명절 연휴가 시작되어서인지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미세먼지가 오든, 예상치 못한 재난이 닥치든 삶은 결국 계속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흐린 하늘 아래서도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 같은 천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일이든 관계든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면 문득 그에 대한 일화가 떠오른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누군가 그에게 왜 톨스토이처럼 정돈된 글을 쓰지 못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쫓기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지만, 자신은 늘 빚과 마감에 쫓겼다고.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 직전에 사면되었고, 시베리아 옴스크 유형지에서 복역하는 동안 간질을 얻었다. 이후 도박에 빠져 큰 빚을 지기도 했다. 젊은 시절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지만, 그의 많은 작품은 빚을 갚기 위해 급하게 써 내려간 것들이었다.


만약 그가 그렇게 쫓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같은 작품을 만날 수 있었을까. 그의 험난한 경험은 고스란히 소설 속에 스며들었다. 등장인물들이 유난히 나약하고 비루하게 그려지고, 인간의 밑바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이유 역시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신에 대한 치열한 질문과 인간 내면에 대한 집요한 탐구는 그가 통과해 온 현실의 무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마감에 쫓겨가며 쓴 글은 정제되기 어렵다. 편집할 여유도, 문장을 정돈할 시간도 부족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때로 만연체로 읽히고 숨이 가쁘게 느껴진다. 그러나 바로 그 덜 다듬어진 문장들 속에서 우리는 날것 그대로의 사유를 만난다. 급하게 써야 했기에 오히려 사유의 흔적이 더 선명하게 남았다.




삶의 깊이는 고통을 피하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을 통과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고대 비극이 지금까지 읽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현실은 비극에 가까웠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꿈을 밀고 나가는 힘은 이성이 아니라 희망이며, 두뇌가 아니라 심장이라고 그는 말한다.


최근 몇 가지 일을 겪으며 지금 닥친 미세먼지만큼이나 마음이 답답했다. 애쓴 만큼 돌아오지 않는 결과, 충분히 이해받지 못했다는 느낌, 여전히 어긋나는 관계...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 역시 내가 통과해야 할 과정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쉽게 자신의 처지만 생각한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라고 묻기보다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할까'를 먼저 떠올린다. 내가 받은 상처는 또렷이 기억하면서도, 내가 준 상처는 잘 보지 못한다. 함께 다투었지만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나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친구여, 나는 지금 굴욕에 빠져 있단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참고 지내야 할 것이 엄청나게 많아. 엄청나게 많은 불행이 그 앞에 놓여 있는 거야."


그의 고백은 과거의 문장으로 남은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상처와 굴욕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앞이 흐려질 때마다 세상이 끝난 듯 느껴지지만, 실은 또 하나의 시간을 지나고 있을 뿐이다.


미세먼지가 걷히면 맑은 하늘이 다시 드러날 것이다. 곧 보게 될 그 하늘을 고대하며 나도 이렇게 희망한다. 상처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그 시간을 통과하며 내가 조금은 달라져 있기를, 좀 더 성숙해졌기를. 그처럼 심장이 완전히 식어버리지 않기를, 끝내 희망을 놓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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