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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n 22. 2022

스스로 만족하는 순간 위험해진다

임윤찬 /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얼마 전 제16회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한 임윤찬(18), 나는 클래식 음악(classical music)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연주의 음악적인 완성도나 실력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좀 다른 면에 주목했다. 인터뷰 내용을 언론 기사에서 일부 인용한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개인적인 의견이다.


밥 먹는 시간을 빼놓고는 피아노를 친다는 피아니스트 임윤찬,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스승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손민수(46) 교수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손민수 교수 역시 촉망받는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렸지만 2008년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오른손이 부러지는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서 4년 가까이 연주를 할 수 없었다. 그는 어렵게 재활에 성공한 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연주하면서 재기했다. 그는 말한다.


"삶은 아무리 최선을 다하더라도 인간의 힘으로 견뎌내기 힘든 고난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멀리 내다보면서 자신을 낮추고 겸허해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는 임윤찬에게 피아노 지도는 물론 독서리스트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클래식 작곡가들이 많은 영향을 받았던 괴테와 실러 같은 문호들의 작품과 시집을 추천했는데, 나중에는 윤찬이가 스스로 윤동주와 릴케, 하이네의 시집을 찾아서 읽었다." 그는 제자 임윤찬이 세속적인 결과보다는 오로지 음악 자체의 완성도를 위해서 애쓴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손교수는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원 유학 시절 '건반 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러셀 셔먼(Russell Sherman, 92)을 사사했다. 셔먼은 음악 전반에 대한 철학적이고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인문학을 중시하는 예술가의 정신이 그대로 손교수를 거쳐 임윤찬에게도 이어진 것이다.


러셀 셔먼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음악을 했는지를 알아야 임윤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피아노 선율로 삶의 본질이 녹아든 시를 쓰는 것 같다고 하여 '음유시인'으로 칭송받는 셔먼의 말을 들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백혜선과 박종화, 손민수, 김규연 등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성장했는데, 제자들은 스승의 연주를 들으면 영혼이 홀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에게 그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다.


"피아니스트는 명배우처럼 연주해야 한다." 그는 악보를 대본에, 연주는 연기에 비유하면서, "대사를 정확하게 읽으면서 개성과 영혼을 불어넣어야 훌륭한 연기가 나오듯, 연주도 악보에 충실하면서 나만의 색깔을 입혀야 한다"고 말한다.


"음악도 스토리텔링입니다. 문학과 비슷해서 작곡가의 인생과 철학이 녹아 있지요. 그 뜻을 이해하고 나만의 음악을 완성하려면 끊임없는 사색과 연습이 필요합니다. 풀잎과 꽃 등 작은 것에도 생명이 있다고 믿으면서 세상을 바라보고 고뇌해야 진정한 음악이 나옵니다."


셔먼은 11세에 부조니와 쇤베르크의 제자였던 에두아르트 슈토이어만을 통해 음악적인 재능을 발견했다고 한다.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컬럼비아대학교 인류학과에 입학한 천재로, 나중에 하버드 교수까지 역임하기도 했다. 특유의 시적 통찰과 감성으로 92세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추구했던 것이 바로 '음악의 진정성'이다. 그는 음악가의 자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연주자는 마음을 열고 음악에 반응해야 합니다. 작곡가의 영혼을 느낄 때까지 인내하고 고통을 감내해야 하지요. 연주를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을 해야 해요. 절대 게을러서는 안 돼요. 그리고 내가 아름다운 선율을 찾을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희망을 잃지 않아야 계속 건반 위에 살 수 있어요.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개성을 담아내는 것도 연주자의 의무입니다."


음악에 자신만의 철학을 심는 것, 장인 정신으로 내 삶의 모든 순간을 실어 전 생애 동안 아름다운 선율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 사람이 진정한 음악가라는 것이다. 나는 임윤찬의 우승 소식을 접하고, 그와 손민수 교수 너머에 있는 러셀 셔먼의 음악과 철학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분야도 다를 바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배출한 젊은 음악가들은 어린 나이에 국제콩쿠르에서 수상하는 등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출발은 좋지만, 30대 후반 40대가 넘어서면서 어느 순간 무대에서 사라진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들이 어려서부터 너무 힘든 과정을 소화하느라 너무 일찍 번아웃된 것이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 BTS가 활동 정지 선언을 했듯이 말이다.


한편 그들의 음악을 뒷받침하는 멘탈이나 철학의 부재가 원인일 수도 있다. 기계적으로 악기를 잘 다루는 사람이 필요하다면 로봇을 이용하면 된다. 그러나 음악은 다르다. 오랜 세월 이어져온 클래식 음악은 악보를 제대로 연주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에 더해 연주자가 창조적으로 자신만의 선율과 화음으로 악보를 재해석하는 것을 중시한다.


그 창조 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악보에 대한 재해석은 창조적인 마인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음악만 잘해서는 안된다는 거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은 음악 한 분야에만 집중할 뿐 전인적인 교육은 등한시하니, 연주 테크닉이 뛰어난 사람들은 배출할지 몰라도 창조적인 음악을 하는 음악가를 낳지는 못하는 것이다. 손민수 교수나 임윤찬처럼 클래식 작곡가들이 영향을 받았던 철학, 심리학, 문학 등 인문학적인 소양을 갖추는 데 소홀했다.


애플사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만든 아이폰이 심플한 구성과 직관적인 편의성으로 출시 당시부터 호평을 받았고 지금까지 사랑을 받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잡스가 젊은 시절 탐구하고 추구했던 동양의 '선' 철학을 아이폰에 구현했기 때문이다. 철학 등 인문학적인 소양이 뒷받침되지 않고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은 음악이나 IT 분야나 다를 바가 없다. 음악을 하지 않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임윤찬은 잠깐 유명세를 치르다가 사라져간 다른 연주자들과는 다른 길을 걷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 이는 우승 후 그가 한 말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상을 받은 후 향후 계획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임윤찬은 이렇게 답한다. “사실 내 꿈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냥 산에 들어가 피아노와 사는 것이다. 커리어에 대한 야망은 0.1%도 없다. 이 콩쿠르에 참여한 목적은 우승할 정도로 피아노를 잘 치기 위함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얼마나 깊이 있는 음악을 들려줄 것인지였다. 내가 아직 너무 준비가 안 된, 너무 부족한 음악가이기 때문에 이런 큰 상을 받는 것이 마음이 무겁고 심란하다."


한 마디로 그는 콩쿠르에서 우승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관객들에게 얼마나 깊이 있는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지, 즉 자신만의 음악적 완성미를 추구하는 것이었다는 거다. 원래 진정한 대가는 상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받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 음악 본연의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임윤찬의 말처럼 사람들의 환호를 뒤로 하고 그냥 산에 들어가 피아노와 함께 살고 싶은 것이다.


그는 다시 말한다.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위험해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항상 만족이란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나는 부디 그가 이 초심을 잃지 말기를 바란다. 그가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최고의 상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게 봤던 것이 바로 그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제 임윤찬의 오늘이 있기까지 도와준 손민수 교수, 러셀 셔먼의 말을 들어보았으니 제16회 반 클라이번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할 때 그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라피협 3번)을 들어보자. 영화 <샤인>의 삽입곡이기도 한 이 곡은 연주하기가 어려워 '악마의 협주곡'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주인공 데이빗 헬프갓이 이 곡을 연주하다가 혼절하기도 했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매일매일이 반복되는 무료한 일상, 한줄기 빛을 찾는다면 바로 이런 철학을 가진 연주자의 클래식 역사에 길이 남을 라흐마니노프라는 불세출의 작곡가의 음악을 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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