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랑은 나를 채우는가

존 버거 ㅡ A가 X에게

by 서영수

이런 텅 빈 밤에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나면,

커다란 무언가가 내게 찾아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요.

침묵은 언제나처럼 압도적이죠.


내가 받은 것은 당신의 응답이 아니에요.

있는 건 항상 나의 말뿐이었죠.

하지만 나는 채워져요.


무엇으로 채워지는 걸까요.

포기가 포기를 하는 사람에게

하나의 선물이 되는 것은 왜일까요.

그걸 이해한다면, 우리에겐 두려움도 없을 거예요.


Ya Nur, 사랑해요.


ㅡ John Berger, A가 X에게

이 문장은 감옥에 갇힌 한 남자가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서로를 쉽게 만날 수도, 곁에 있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여전히 “사랑해요”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응답을 기대하는 말이라기보다, 이미 충만해진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자기 고백에 가깝습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보통 누군가의 응답을 통해 완성된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글이 유독 기억에 오래 남은 것은, 저 역시 한때 답을 기다리며 사랑을 말해 본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젠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나의 일방적인 말로도 내가 채워질 수 있다고. 그 이유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그 감정이 이미 내 안에서 하나의 완성된 상태가 되기 때문이라고.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아무도 듣지 않을 것 같은 밤에도 누군가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러 보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가끔은 답이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은 그런 때 말입니다. 그 순간에는 마치 그 말이 이미 어딘가에 닿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랑은 내가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상대의 태도나 반응에 기대는 순간 감정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사랑이 실패하는 지점도 어쩌면 바로 그 순간일 겁니다. 사랑하다가 중간에 흔들리는 것은 상대 때문이라기보다, 상대의 응답을 조건으로 삼았던 나의 조건적인 사랑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짝사랑이나 외사랑도 어떤 의미에선 실패한 사랑이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포기’가 포기하는 사람에게 하나의 선물이 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그 무엇인가를 잃는 동시에 이상하게도 다른 무엇으로 더 충만해집니다.


어쩌면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아낌없는 낭비인지도 모릅니다. 시간을 쓰고 마음을 쓰고, 때로는 아무런 보답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무언가를 건네는 일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를 앞세우던 마음은 조금씩 사라지고, 그 사람을 향한 마음만 조용히 남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나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로도 내가 충만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랑은 언제나 말을 넘어섭니다. 때로는 상대의 침묵조차도, 심지어 포기하는 순간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듭니다.


어쩌면 온전한 사랑이란 누군가를 붙잡는 일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해지는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서로를 만날 수 없어도 여전히 “사랑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말이 이미 그 사람의 삶을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사랑은 더 이상 상대의 응답에 흔들리는 감정이 아니라, 부재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나를 무너뜨리는 감정이 아니라, 조용히 나를 완성해 가는 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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