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고 있겠지.
또 앞으로도 잘 살아가겠지.
나는 다만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몇 년 전 읽었던 이기호 작가의 소설 <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에 본 문장이다.
얼마전부터 이 문장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오래전에 헤어진 사람, 이제는 어떻게 살든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다소 심드렁해진 주인공의 복잡한 심정을 이 한 문장으로 다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복잡한 내 마음을 이 글만큼 적절히 표현하긴 어려울 것 같다.
주인공처럼 저런 생각이 필요할 때가 있다. 안 그러면 자신만 힘들고 피곤해지니까. 그런데 이게 말처럼 잘되지 않는다. 하물며 상대의 언행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아마 주인공도 분명히 저렇게 말하고서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원래 생각을 안 하려고 하면 생각이 더 많아지는 모순에 빠진다. 생각도 적당한 순간 흘려보내야 한다.
'혹시 자신 때문에 고초를 겪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가 안쓰럽다거나, 미안한 마음 또한 들지 않는다고.' (그녀는 남편을 죽인 살인범으로, 그녀가 언급한 남자는 그녀가 한때 관계를 맺었던 사람으로 공범으로 의심받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또 했을까? 문장으로 표현하면 한 사람의 심정도 이렇게 간단히 정리될 수 있을까. 문장이 갖는 힘이지만, 문장의 한계이기도 하다.
남편을 살해한 여인이 독백 조로 자신의 지난 이력을 진술하고 있는 소설. 생각이 많아져서 말도 줄였다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누구나 마음이 복잡해진다. 세 명의 남자와 관계를 맺은 그녀, 그러나 그들을 깊이 사랑했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인간의 감정이 그렇게 한 단어로 명료하게 정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잘 보여준다.
어렵게 마음먹고 불륜 사실을 고백했는데도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일상을 이어가는 남편, 보통의 남자라면 보일 수 없는 태도 앞에서 오히려 주인공은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그 말을 속으로만 되뇔 뿐.
배우자에게 무관심했던 남편의 모습이 과연 우리라고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것은 바로 그 '무반응'이다. 분노나 다툼은 여전히 관계 안에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태도는 이미 마음이 멀어졌다는 신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미움보다 무관심이 더 견디기 힘들 때가 있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잘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처음 인용한 문장, 그녀가 내뱉은 "잘 살고 있겠지."라는 말은 상대를 위한 말이라기보다, 더 이상 그 사람에게 마음을 쓰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들렸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 역시 자신이 한때 정을 나누었던 그를 자신의 삶에서 조용히 지워 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무반응에 가까운 ‘무심함’이랄까.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러기 전에 서로 노력해야겠지만, 요즘 사회 분위기를 보면 쉽지 않아 보인다. 주인공 김숙희 같은 여인이 소설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이다.
작가의 말대로. "그러니까 사실 나는 지금도 이것이 궁금하다. 왜 어떤 사람은 살인자가 되고, 또 어떤 사람은 정상이 되는 것인지. 혹시 그것은 같은 것들이 아닌지." 아마 작가는 이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닐까.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밉다는 이유로 마음속으로 여러 사람을 죽이지 않는가. 마음에서 누군가의 흔적을 지우는 것, 그것 역시 살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어떤 정답이 책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정답을 찾기 위함이 아니라, 정답이 없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놓지 않으려는 것, 즉 질문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기 위함이다. 인간이 AI와 여전히 다른 점은 바로 이 질문하는 힘에 있다. 그렇다면 작가의 이 소설은 성공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