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서로를 오해하는가>
삶은 끊임없는 오해의 연속이다. 오해하고 또 오해하고, 그러다 처음 오해했던 것마저 잊어버리는. 체념은 그런 상황에 지친 우리가 끝내 도달하게 되는 마지막 상태가 아닐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생각도 다르고,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르며, 각자의 경험과 입장 또한 다르다. 그러다 보면 오해가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오해'와 '이해', 한 글자 차이지만 결과는 판이하다. 오해하면 멀어지고, 이해하면 가까워진다.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라비크는 나치를 피해 파리로 흘러든 독일인 외과의사다. 불법 체류자인 그는 신분을 숨긴 채 다른 의사의 이름으로 수술을 집도하며 살아간다.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삶.
그런 라비크가 조앙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자주 어긋난다. 라비크는 미래를 약속할 수 없어 거리를 두고, 조앙은 그 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하지만 끝내 닿지 못하는, 그런 관계다.
균열이 깊어진 어느 날, 조앙이 말한다.
"하지만 당신도 저를 이해하지 못하네요."
라비크의 대답은 이렇다.
"대체 누가 이해를 하고 싶겠어? 바로 거기서 세상 모든 오해가 생겨나는데…"
잔인하리만큼 솔직한 말이다.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 그 욕망 자체가 이미 상대를 내 방식으로 재단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는 것. 라비크는 그걸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너무 지쳐서 그냥 뱉어버린 말이었을까.
어쩌면 이해하려는 마음은 필요하지만, 문제는 그 방식에 있는 지도 모른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려 하기보다, 내 기준으로 해석하려 할 때 오해는 생긴다.
좋을 때는 한없이 좋지만,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금세 거리가 생기는 게 사람 사이가 아니던가. 하물며 정을 나누는 연인 사이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걸 버티게 해주는 건 결국 서로에 대한 믿음과 변함없는 마음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을 내 바람에 맞추는 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사랑은 결국 이해를 요구한다. 어느 순간, 그 이해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사랑은 조용히 끝을 향해 간다. 그래서 사랑은 시작도 어렵지만, 지키는 건 훨씬 더 어렵다.
김소연 시인은 말했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라고.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요즘은 이해가 되지 않으면 가급적 받아들이려 한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진 점이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나의 한계려니 생각하고, 아니면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더 큰 뜻이 있을 거라 믿고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믿음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미리 믿는 것'이라 했다. 문제는 그때까지 견딜 수 있는지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시간을 못 견뎌 한다. 나도 그랬다. 이젠 덜 그러려고 하지만 여전히 장담할 수 없다. 시간을 견디는 것, 그것도 결국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먼저 인정하면 좋을 것 같다. 전체를 보지 않고 일부만 보고 비난하거나 오해하는 건, 그 사람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쉽게 단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그리고 조금이라도 시선을 바꾸려는 노력이, 어쩌면 오해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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