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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l 17. 2022

그들이 이야기하는 방식

톨스토이 / 전쟁과 평화


우리는 누군가의 말에 영향을 받고 내가 하는 말을 통해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정확히는 말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말을 지배하는 감정에 영향을 더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말도 감정을 실어 말하면 좋게 들리지 않는다. 조언을 해준답시고 섣불리 충고했다가 오히려 반발만 사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 말하기 전에 내 감정부터 추스를 일이다.


친밀한 사이, 특히 부부 사이를 예로 들면 말이 아니라 말에 담긴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수 있다. 같은 말이라도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어떤 감정을 담아서 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확연히 달라진다. 맞고 틀리냐는 그다음 문제다. 내가 아무리 옳다고 해도 옳게 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오히려 나를 가르치는 거냐며 한 소리 듣기 십상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는 부부 사이의 미묘한 대화방식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나온다. 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가 오랜만에 돌아온 피예르, 그는 나타샤와 재혼해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부부,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 특히 이들 사이에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소통하는 방법이 있었다. 이심전심이라고 할까.




'나타샤는 남편과 단둘이 남게 되자마자 부부 사이에서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즉 판단과 추론과 귀결을 통하지 않고, 모든 논리의 법칙에도 어긋나는 완전히 특별한 방식으로 평소와 달리 빠르고 분명하게 서로의 생각을 파악하고 전달하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타샤는 이 방식으로 남편과 이야기하는 데 익숙했기 때문에, 피예르가 논리적으로 사고를 전개하면 그것은 오히려 두 사람 사이가 원만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뚜렷한 신호가 되었다. 그가 논리적인 어조로 사려 깊고 침착하게 말하거나, 그녀가 남편에게 끌려들어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는 날은 반드시 말다툼을 하게 된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일시에 많은 일을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분명한 이해를 방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두 사람이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신호가 되었다. 꿈속에서는 꿈을 인도하는 감정 외에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무의미하고 모순 투성이인 것처럼, 모든 이성의 법칙에 위배되는 이 의사소통에서도 시종일관하고 분명한 것은 말이 아니라 말을 인도하는 감정이었다.' (4권, 453 - 454쪽)




오래된 부부 사이거나 여전히 사랑하는 부부라면 나타샤가 남편인 피예르와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세월을 함께 보낸, 지금까지도 잘 지내고 있는 부부의 특징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방식, 어쩌면 이런 방식을 터득한 부부들만이 '끝까지 사이좋게' 백년해로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감정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것, 그건 어느 일방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들 대화가 안 된다는 부부나 연인들이 있다. 오래전 그 말을 듣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화로 해결이 안 되는 문제가 있을까? 차분하게 자기 생각을 말하면 이해시킬 수 있지 않을까. 헛된 기대였고 착각이었다. 대화가 안 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가장 이성적인 사람들이 끌고 간다는 국가 간, 남북 간에도 대화가 되지 않는데 하물며 남녀 사이는 말할 것도 없다.




대화를 잘하기 위해선, 먼저 상대의 말을 들어야 하고, 들은 말을 이해해야 하며,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 서로의 기분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불필요한 감정의 찌꺼기를 쌓아두지 않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안 좋은 감정이 남아 있는 상태에선 솔직함이 오히려 관계를 해치는 흉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상대가 어떤 마음의 상태에 있는지 헤아려서 가급적 마음에 있는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배려해야 한다.


꽉 막힌 협상, 출구를 만들려면 서로 양보를 해야 하듯, 남녀 사이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여자의 마음(감정)을 헤아려야 하고, 여자는 남자의 생각(이성)을 이해해야 한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도무지 해결이 난망해 보이는 남북 관계를 푸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불평하고, 남자는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 도무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며 대화를 회피해 버린다. 이성과 감성이 충돌하니 방법을 찾기 어려운 거다. 아, 신은 왜 남자와 여자를 이렇게 다르게 만들었다는 말인가. 물론 신의 탓이 아니다. 조화롭게 살지 못한 우리 탓이지.


피예르는 나타샤의 마음을 잘 헤아렸다. 어쩌면 결혼에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일지도, 아니면 평소 호인으로 남을 배려하는 품성이 배우자에게도 드러난 것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사랑의 힘일 수도 있다.


나는 톨스토이의  글을 읽고 그의 탁월한 통찰에 감탄하지 않을  없었다. 그의 부인 소피아는 악처로 소문난 여자가 아니던가( 부분은 논란이 있다. 톨스토이가  글을 교정해주고 편집해준  그녀였다). 그는 배우자를 통해 이런 사실을 깨달은 것일까. 어떻게 여자의 마음을  헤아리는지 괜히 톨스토이가 아니었다.




송길영 역시 그의 책 <상상하지 말라>에서 이렇게 조언한다.


"인간의 존엄은 쓸모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우리가 타인을 배려하는 것은 공감empathy하기 때문이지 동정sympathy하기 때문이 아니다. 상대방이 경쟁력이나 재물이 부족해서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인간이기에 공명共鳴하는 것이다.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사람 사이의 정서가 배려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역시 핵심은 배려와 공감이라는 말이다.


어제는 오후 들어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무더웠는데 소나기가 내리니 다소 시원해졌다. 맑았다가 흐리다가 비까지 내리고, 날씨가 변덕스러운 것이 꼭 내 기분을 닮았다. 그럼에도 나는 날씨 탓을 할 수가 없었다.


어디 날씨만 그런가. 누구도 탓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 물론 그렇다고 서운한 감정이 드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이 비 또한 곧 그치듯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일 또한 지나가겠거니,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추억이 되겠거니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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