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영수 Jul 19. 2022

도스토옙스키를 위한 변명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 - 1881) 같은 천재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 일이든, 사람과의 관계든 -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상황이 내 의지를 무시한다고 느껴질 때 언젠가 읽은 그의 인터뷰를 떠올린다.


누군가 도스토옙스키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톨스토이처럼 정돈된 글을 쓰지 못하나요?" 그의 대답이 이랬다. "톨스토이는 돈이 많잖아요. 그는 쫓기지 않고 글을 썼으니까.”


그의 말처럼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 직전에 사면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감형받은 징역형을 살기 위해 시베리아 옴스크에 복역 중에 간질에 걸려 많은 고생을 했다. 그 후 도박에 빠져 많은 빚을 지기도 했다.


젊은 시절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사실 그의 글은 도박빚을 갚기 위해 급하게 쓴 글들이 많았다. 그가 도박에 빠지지 않았다면 우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같은 위대한 작품을 구경하지도 못했을지 모른다.




그의 험난한 삶의 경험은 그대로 그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그의 소설이 톨스토이에 비해 어둡고, 등장인물들이 속된 말로 찌질한 건 그의 그런 삶의 궤적과 무관하지 않다. 온갖 인간 군상들에 대한 탁월한 심리 묘사, 신에 대한 심오한 통찰은 그의 비루한 현실에 대한 치열한 사색의 결과였다.


아무튼 마감에 쫓겨가며 쓰다 보니 정제된 글을 쓰기 어려웠다. 시간도 없었고, 늘 사는 게 힘들었다. 편집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의 글이 만연체로 읽기 어려운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러나 그렇게 덜 편집된 글이 오히려 지금은 빛을 발하고 있다. 날 것 그대로의 그의 사상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주 고쳤으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작품과는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급하게 써야 했으니, 사유의 흔적이 작품에 그대로 남았다고 할 수 있다.




삶의 깊이가 뒷받침되지 않는 책은 가볍다. 깊이는, 고통스럽고 힘든 현실에 대한 처절한 고민과 사유에서 나온다.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 등 그리스 비극이 아직도 읽히고 있는 이유이다.


절망스러운 현실은 도스토옙스키라는 위대한 작가를 낳았다. 그의 현실은 비극이었지만 그는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말한다. "꿈을 밀고 나가는 힘은 이성이 아니라 희망(Hope)이며, 두뇌가 아니라 심장(Heart)이라고." 어려운 상황일수록 희망을 잃지 말고 내 심장을 뛰게 해야 한다. 비록 그게 무위에 그칠지라도. 인간은 노력하면서 빛이 나는 존재니까.


예전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요즘은 그러려니 한다. 대개 원하는 건 인간적인 욕망이니까. 욕망이 성취되지 않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서 그런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아마 두 가지 이유 모두일 게다.


요즘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마음 한 구석이 섭섭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랐던 건 더더욱 아니다. 다만 이번에 겪은 일을 통해 인간의 한계와 노력, 감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자신의 처지와 입장만 생각하고 상대방의 입장은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 우리들. 역지사지(易地思之), 그건 고전에 나오는 문구에 불과했던 거다. '저 사람이 왜 저러지? 내가 이러면 그가 힘들지 않을까? 너무 내 생각만 하는 건 아닐까? 사람이 한 번에 바뀌진 않지, 그래도 많이 노력하네.' 이렇게 생각하기는 어렵다.


내가 받은 상처만 아프고, 내가 준 상처는 상처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기준이기 때문에 느끼는 착시현상이다. 함께 싸웠지만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것처럼. 나는 그렇지 않을까. 자신할 수 없다. 그 입장이 되면 나도 그랬을지 모른다.


지금으로선 잊어버리는 것이 답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내 생각뿐, 다른 사람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어야 한다. 시간은 진실을, 무엇보다 내 진심을 드러내 줄 테니까. 끝까지 모른다면 불행한 일이다. 그전이라도 깨닫는다면 물론 다행인 거고.




“친구여, 나는 지금 굴욕에, 지금 굴욕에 빠져 있단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참고 지내야 할 것이 엄청나게 많아. 엄청나게 많은 불행이 그 앞에 놓여 있는 거야.”



<도스토옙스키 _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매거진의 이전글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