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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l 28. 2022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

김연수 /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어젯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가 일어나서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자보려고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별의별 생각이 다 들면서, 오히려 생각 때문에 마음만 더 심란해졌다.


책 속의 문장에 집중하면서 생각을 잠시 멈춰볼 요량이었다. 한편 책을 읽다 보면 잠이 올 듯싶었다. 그때 읽었던 김연수의 소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는 살면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상처는 생각하면 덧나기 마련, 그때 주인공의 아버지가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기 위해 신문을 읽고 또 읽었던 장면과 나중에 주인공이 그 의미를 회상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나는 찬바람이 부는 바닷가 벤치에 앉아 검은 밤바다를 바라봤다. 부드러운 음률을 듣듯이 어둠을 하나하나 지켜봤다. 아픔과 슬픔도 지나치면 그렇게 세세한 결로 보인다. 내게 상처 입힌 윤리 선생에게 그와 똑같은 무늬와 결을 되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되돌려줄 수 없었다.


신문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용서했다는 아버지가 있으니 말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다락에서 찾아서 들고 온 아버지의 스크랩북을 펼쳤다. 오렌지빛 가로등 불빛에 기대 나는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천천히, 아버지가 붙여놓은 그 기사들을 읽었다. (...)


다 읽은 뒤에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글자와 글자 사이, 문단과 문단 사이, 생각과 생각 사이를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 여름 내내 도서관 한쪽에 앉아서 도대체 무엇을 읽었던 것일까? 누구를 용서했던 것일까?


파도와 파도 사이. 바람과 바람 사이. 달빛과 달빛 사이 이런저런 생각이 오갔다. 나는 꿈결을 걷듯이 그 칼날의 생김새를 닮은 그 무늬와 결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어둠 속을 걸었다. 어둠은 이내 따뜻한 물기로 뺨에 와닿았다.'


<김연수 _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

상처를 주었든 상처를 받았든, 용서는 상처를 전제로 한다. 용서는 단번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주인공의 아버지처럼 며칠 동안 신문이라도 읽으면서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무엇보다 나를 버려야 하는 힘든 과정이다.


그는 신문을 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읽은 것이리라. 현재의 상황과 다소 동떨어진 신문 기사를 접하면서 마음을 내려놓고 또 내려놓았던 것이다. 감정적으로 힘들 때, 책을 읽으면서 책 속의 문장 한 줄 한 줄에 집중하는 것도 비슷하다. 그래서 나도 어제 잠이 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책을 읽었던 것인지도 모르고.


무슨 기사였는지, 어떤 내용의 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라도 나를 견디고 이겨내고 싶었던 것이다. 상황에 대한 치열한 인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 용서나 화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나를 찾았다는 말이 있다. 장자의 '오상아(吾喪我)'. 나를 내세우면 더 많은 나를 잃게 된다. 버려야 얻을 수 있다.


아마 그가 신문을 그렇게 열심히 본 것으로 보아, 그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돌아보고 또 돌아봤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자신이 받은 상처를 지우고, 그 자리에 용서를 채웠던 것이다. 상처를 준 사람에게 똑같이 보복할 수 있다.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받았던 상처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칼날의 생김새를 닮은 상처를 다시 생각한다고 해서 생채기만 나지 않겠는가. 나만 더 힘들어질 뿐이다.


7월도 이제 거의 다 갔다. 얼마전 새해를 맞아 결심과 다짐을 했던 것 같은데 벌써 반년이 지나가 버렸다. 새해에 결심했던 다짐들, 벌써 희미해졌다. 한해의 하반기를 맞아 새로운 결심과 다짐을 다시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나는 어떤 이유에선지 새로운 다짐은커녕 여전히 의욕이 없다. 따지고 보면 누구 탓도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기 마련이고, 나도 다를 바 없다. 그러니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하다고 다른 사람을 원망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말처럼 쉽게 되지 않는 일, 그냥 물 흐르듯 시간의 흐름을 지켜보는 수밖에. 눈에 피로감이 느껴져 다시 누웠다. 나도 주인공의 아버지처럼 이제 모든 걸 그만 내려놓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일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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