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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Aug 06. 2022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었다

한동안 비가 내리더니 어느덧 비는 그치고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비가 오지 않으니 산책을 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걷는 사람들도 늘었다. 걸으며, 때로 다른 사람의 걷는 모습을 보며 걷는 것만큼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입추, 곧 여름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뭔가 아쉽다. 나를 스쳐가는 모든 것이 그런 것처럼. 


앞서 걸어가는 젊은 연인들, 서로를 놓칠세라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 좋은 때구나. 문득 ‘좋은 시간은 신도 질투한다’라는 영화 대사가 기억났다. 그들의 사랑이 오래갔으면, 힘든 상황이 와도 지금 붙잡고 있는 손의 힘으로 잘 이겨냈으면, 처음 가졌던 그 사랑이 끝까지 변치 않았으면. 무엇보다 마지막이 서로에게 아름다웠으면. 어느새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득 남진우 시인의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었다> 시가 떠올랐다. 

Marc Chagall,  Les amoureux, 1916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낡은 수첩 한구석에서 나는 이런 구절을 읽게 되리라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랬던가

너를 사랑해서

너를 그토록 사랑해서

너 없이 살아갈 세상을 상상할 수조차 없어서

너를 사랑한 것을 기필코 먼 옛날의 일로 보내버려야만 했던 그날이

나에게 있었던가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한사코 생각하는 내가

이토록 낯설게 마주한 너를

나는 다만 떠올릴 수 없어서

낡은 수첩 한구석에 밀어 넣은 그 말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줄을 긋고 이렇게 새로 적어 넣는다


언젠가 너를 잊은 적이 있다

그런 나를 한 번도 사랑할 수 없었다


<언젠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었다 _ 남진우>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오는 건 순간인데 나가는 시간은 아주 오래 걸린다. 사랑하는 것보다 헤어지기가 훨씬 어렵다는 말은 그 뜻이리라.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순간, 상대에 대한 걱정보다는 어떻게 하면 내가 덜 비난을 받을지부터 생각한다. 헤어질 적당한 이유를 외부에서 찾는 것, 그래야 부담이 덜하다. 그만큼 우리는 이기적이다. 아니, 이기적이어야만 헤어질 수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사랑하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좋은 것이다. 반면에 헤어질 때는 '온갖' 이유가 붙는다. '그냥' 헤어지는 사람은 없다. 나도 어쩔 수 없다며, 너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상황이 이러저러하니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자기 합리화를 위해선 말이 많아질 수밖에. 누군가 좋아진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헤어져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그래서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시작되지만, 이별은 설명할 수 '있는' 이유로 끝이 난다. 


상대의 장황한 변명, 남겨진 사람의 침묵 또는 짧은 몇 마디. 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그 사람 없이 앞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해서 또는 그 사실을 상상할 수 없어서 말을 잊은 것이다. 말의 무력함이 곧 그 자신의 무력함이다. 사랑과 달리 이별은 일방적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섭섭함도 슬픔도 아픔도 이제부터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만 한다. 헤어지면 남보다 못한 존재로 남는 것, 그게 우리가 했던 사랑이었다. 


더 사랑했던 사람이 마음을 정리하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사람에게 다가간 거리가 길었던 만큼 돌아오는 길 또한 멀기 때문이다. 정리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니 괴로움 또한 클 수밖에. 사랑하는 그 사람이 떠나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헤어진 후에도 그 사람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별의 상처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치유된다.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 무렵 비로소 치유가 시작되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 시절의 추억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그 사람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이다. 그는 그만큼 많이 아파했을 테니까. 잊지 않고서는 살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여, 누구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더 많이 노력해야만 한다. 사랑의 완성을 위해선 남다른 의지가 필요하다. 결국 의지가 없어 우리는 사랑을 잃는 것이다. 사랑은 의지고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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