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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Sep 07. 2022

지금 이 순간,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

북촌 / 한옥마을

주말에는 보통 집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책을 읽곤 했는데, 어느 순간 지겨워졌다. 코로나19로 실내에서 마스크를 한 채 오래 있어야 하는 것도 불편했다. 이런저런 이유를 핑계 삼아 가볍게 점심 식사를 한 후 집을 나섰던 것이 벌써 한 달째. 지난 겨울부터 시작된 동네 산책이 게절이 바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는 특별히 취미도 없고 도락도 즐기지 않는 편이다. 골프라든지, 테니스 같은 취미나 오락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다. 최근에는 여행도 거의 간 적이 없다. 싫어하는 건 아닌데, 짐을 꾸리거나 일정을 짜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자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이런 내 취향을 아는 사람들은 날마다 집에서 하는 일 없이 따분한 시간을 때우려고 TV나 보면서 빈둥거리는 모습을 상상할 텐데, 실상은 사뭇 다르다. 책을 읽거나 뭘 쓸 때가 아니면 거의 집에 붙어 있지 않는다. 뭔가 강박증에 걸린 거 아니냐고 하지만, 무료하게 집에 있는 것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는 관성이 있다. 한 번 시작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걸 반복하는 것. 한때는 주말마다 카페에 가서 책을 읽는 습관을 들였다. 왜 그랬는지 딱히 이유는 없다. 책은 읽고 싶은데 집에는 있고 싶지 않고 뭐 그런 이유였던 것 같다. 걷는 것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한 번 갔던 곳을 자주 가는 편이다.

지난 겨울을 생각해보면 봄, 가을만큼 산책하기 좋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옷을 잘 껴입으면 다소 쌀쌀해도 나름 걷기에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차면 그만큼 공기는 청명하다.


대개 경복궁 돌담길을 거쳐 청와대를 지나 안국동을 통과해 북촌으로 가는 코스를 택했다. 걷다 보니 경복궁과 서촌, 북촌이 이렇게 가까울 줄은 몰랐다. 멋진 카페와 화랑, 미술관은 또 얼마나 많던지. 그동안 이곳을 자주 걷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한적한 경복궁 돌담길. 고궁이고, 청와대가 가까워서 그런지 눈에 띄는 상가도 별로 없다. 고즈넉한 분위기, 콘크리트 건물만 보다가 고궁을 보니 옛 건축물의 우아하고 멋스러운 모습, 정제된 절제미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말처럼 '검소하되 누추해 보이지 않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한때 북촌이란 곳이 뭐 하는 곳인지 잘 모르던 때도 있었다. 대학시절, 학교에서 가까운 대학로나 종로 정도를 갔던 것 같고, 북촌에는 가본 기억이 없다. 아마 갔더라도 눈여겨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야 비로소 그 가치가 보이게 마련이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촌에 처음 갔을 때의 느낌은 사람이 많다는 것 그리고 한옥에 어울리지 않게 옷 가게나 음식점이 많다는 거였다. 한옥마을이라고 해서 뭔가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기대했는데, 관광지 비슷하게 흥청망청하는 분위가 썩 마땅치 않았다. 그 후론 영화를 보기 위해 한두 번 들른 것 말고는 자연스럽게 발길을 끊었다.


최근에 가보니 청와대가 개방되어서 그런지 사람들로 무척 붐볐지만, 코로나19 탓인지 폐점한 가게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내부가 고급스럽게 장식된 가게들이 꽤 많았다. 아무래도 층고 제한이 있어서 그런지 작은 공간을 활용한 세련된 미적 감각이 돋보였다.

특이한 형태의 카페도 많았는데, 그곳에는 사람들이 꽉 들어차 커피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블루보틀이나 오설록 같은 유명한 차나 커피 전문점도 빠질 리 없다. 그곳도 역시 사람이 많아 앉을 자리가 없었다. 커피를 한 잔 마실까 하다가 지나친 적이 여러 번이다.


북촌은 사람들로 항상 붐비지만, 한적한 곳도 있다. 북촌 한옥마을과 연결된 가회동 쪽으로 가는 길, 주택가라 비교적 조용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가로수다. 오래된 소나무가 길가를 따라 일렬로 심어져 있다. 왜 이곳이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었는지 생각해 보니 소나무 때문이었다. 오래된 소나무들이 한옥과 어우러져 북촌이라는 거리의 기품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이야말로 정말 북촌 중의 '북촌'이다.


나는 지난 주말에도 북촌 일대를 걸으며 지친 한 주간의 피로를 털어버리려고 했다. 굳이 여행을 가지 않아도, 맛있는 것을 먹거나 좋은 장소를 구경하지 않아도 내가 사는 주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쉼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이번 주말도 잘 쉰 셈이다.

"휴식이란 내가 사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경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쁜 와중에 잠시 시간을 내서 쉴 때마다 나는 깨닫는다. 나를 둘러싼 반경 10미터 정도, 이게 바로 내가 사는 세계의 전부구나.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몇 명, 혹은 좋아하는 물건들 몇 개.


물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세계가 그렇게 넓을 이유도, 또 할 일이 그렇게 많을 까닭도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정말 나는 잘 쉰 셈이다."



<김연수 _ 지금 이 순간, 내가 아는 여름의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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