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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Sep 08. 2022

아름다운 죽음

찰스 핸디 / 알랭 들롱

며칠 전 산책을 하다가, 나이가 지긋한 그러나 지적인 느낌이 풍기는 노부부를 보았다. 그들은 손을 잡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왜 이렇게 느리게 걷지?' 하면서 앞질러 갔을 텐데 그날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를 듣기 위해서 일부러 천천히 걸었던 것은 아니다. 미래에 나도 저런 모습으로 곱게 나이가 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나마 그들을 더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로를 향한 따뜻한 미소, 부드럽고 조용한 말투,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 화려하진 않지만 정돈된 외모와 옷차림... 하루아침에 몸에 밸 수 없는 격格이 느껴졌다. 잠깐이지만 그들을 통해 살아온 삶의 흔적으로 얼마든지 늚음을 커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누구나 늙는 것을 피하고 싶어 한다. 언제까지나 젊고, 활기있게 살고 싶은 게 인간이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고, 어느 순간 죽음을 맞아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제 그런 생각을 할만한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 '어떻게 하면 늙지 않고 젊게 살 수 있을까?' 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남은 인생을 의미 있고 후회 없이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지난 3월 말 '세기의 미남', '20세기 미남의 전형'으로 불리던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Alain Delon, 86세)이 안락사를 결정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는 2019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최근 몇 년간 건강상의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는 토로한다. “나이 든다는 건 끔찍하다. 우리는 나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외모가 생명인 배우였으니 그는 자신의 쇠락을 견딜 수 없었으리라. 늙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 어떻게 늙어가야 세월 앞에 담담할 수 있을지 그 기사를 읽고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득 그보다 일주일 전, 결은 다르지만 비슷한 취지의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영국의 경영사상가 찰스 핸디(Charles Handy, 89세)의 인터뷰. 그는 현재 고령으로 침대에 누워 지낸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 앞에서 마지막 인터뷰를 한 셈이다.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경험한 행복은 어떤 상태였나요?


“할 일이 있고 사랑할 사람이 있고 기대할 것이 있는 상태, 내 삶의 모토였죠.” 그의 말을 곱씹어 보니 우리의 마지막 모습은 그동안 내가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시 말한다. 


오로지 현재의 순간을 즐기고 있습니다. 침대에 누워있다 보면, 생의 좋았던 시간만 떠오릅니다. 세상엔 내가 누린 좋았던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아요. 새소리, 봄에 피는 꽃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나무들... 기쁨은 절대 셀 수 없는 것들이죠. 천국이 이런 곳이 아닐까요.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 이제 나이가 들어 그들 모두 죽음을 앞두고 있다. 한 명은 비교적 건강한 편인데도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닌 인위적인 생명 단축의 안락사를 선택했다. 반면 또 한 사람은 비록 건강이 좋지 않아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비교적 평온한 마음으로 무엇보다 자신이 살았던 지난 시절에 대해 감사하며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나이가 들면 젊을 때만큼의 외모나 체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알랭 들롱은 자신의 멋진 외모 때문인지, 젊었을 때부터(최근까지도) 여성 편력이 무척 심했다. 그때는 지금 이런 자신의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을까.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는 화려한 삶을 살았으니 늙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빛이 강렬할수록 어둠으로 들어가면 헤매듯이, 높이 올라가면 내려오는 길이 험하듯이, 준비가 안된 사람은 마치 나는 영원히 예외인 것처럼 살다가 어느덧 다가온 죽음 앞에서 당황한다. 


화려한 삶을 산 사람일수록 화려하지 못한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에 찰스 핸디는 유명 회사의 경영인으로 활동하다가 뜻한 바 있어 조기 은퇴한 후 경영대학원을 설립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했다(영국에 비즈니스 스쿨이 생긴 것도 그의 공로라고 한다). 시간이 남으면 책을 쓰면서 제2의 인생을 살았다. 


그가 낸 책은 아직도 피터 드러커와 함께 경영 분야의 베스트셀러로 서점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최근에도 그는 자신의 손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서간문 <삶이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같다>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그는 다가오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안락사'를 뜻하는 에우타나시아(euthanasia)를 그리스어로 어원으로 직역하면 '아름다운 죽음'이란 뜻이다. 죽음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존엄하게 죽고 싶어 한다. 문제는 병으로 지쳐서 혹은 너무 늙은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 안락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다.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할 수 없다. 


죽기 싫어 안달하는 것도 아름답지 않지만, 더 이상 늙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아름답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자연스럽게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존엄사'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런 이유로 스위스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가는 안락사를 금지하고 있다. 


아름다운 죽음은 결국 그동안의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살았는지, 즉 아름다운 삶을 산 결과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흔적이 마지막 모습에 반영되는 것이다. 죽음과 삶은 동전의 양면이듯, 아름답게 죽기 위해서는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알랭 들롱의 안락사 결정이 씁쓸한 건 그런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찰스 핸디의 조언 하나, 그의 지금까지의 삶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이런 가치관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인간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일부 시행착오를 빼고, 그 삶이 아름답지 않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돈에 초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인생의 너무 많은 시간을 쏟지 말라는 거죠.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고, 원치 않는 일을 계속하면 영혼이 망가집니다. 인생엔 오롯이 좋은 감정만으로 충분합니다. 계산을 멈추고 감정을 보세요. 행복은 계산할 수 없는 감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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