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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Sep 14. 2022

지금 이 순간 뭔가를 해야

Ruth B.의 음악

잊어야 할 일은 잊지 못하고 잊지 말아야 할 일은 잊어버리니 이런 모순이 또 있을까. 이만 잊어야지, 생각하면 더 기억에서 새로워지니 그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게 인생인 것을. 우리의 한계인 것을.


어젯밤에는 잠을 쉽게 잘 수 없었다. 긴 연휴 끝에 출근해서 그런지 해야 할 일들이 있어 늦게 퇴근한 탓도 있지만,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들었던 곡이 오늘 소개하는 이 곡이다. 낮은 피아노 반주로 시작되는 곡. 나는 기분이 울적할 때는 Ruth B.의 음악을 종종 듣곤 한다. 감성적인 보컬이 인상적인 캐나다 출신 싱어송라이터, 그녀의 곡들은 소울풍의 느낌이 난다.


한 곡의 음악이 기분을 바꾸기도 한다. 3분 남짓의 짧은 시간, 그 순간 음악의 흐름에 집중하다 보면 잠시나마 고민과 걱정을 잊을 수 있다. 그녀의 대표곡은 <Lost boys>지만, 시간이 되면 <If by chance>나 <Mixed Siganals>을 들어볼 것을 추천한다.


경험상 우울할 때는 비슷한 성향의 음악을 듣는 게 나은 방법인 것 같다. 괜히 신나는 곡을 들으면 감정을 위장하는 것 같아서 별로다. 그런다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지도 않고.

김연수 작가의 산문집 <소설가의 일>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앞으로 봄이 되면 무조건 시간을 내어 좋아하는 사람과 특정한 꽃을 보러 다니고, 잊지 못할 음식을 먹고, 그날의 날씨와 눈에 띈 일들을 일기장에 적어 놓으세요. 우리 인생은 그런 것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분명히 있다. 그때 전달되는 것은 우리가 형식적이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잎이 빨갛게 물드는 아름다운 가을에 대해 뭔가 남기고 싶으면, 이 계절에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쓰지 말아야 한다. 추상적인 것은 오래 기억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을이네. 좋다. 아름답다. 단풍이 예쁘네.' 이런 말들은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아니 말하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 하여, 작가의 말대로 어떤 것을 보았는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무엇보다 그 순간 누가 내 옆에 있었는지를 말해야 한다. 그보다 더 오래 기억하고 싶다면 일기장이나 이런 곳에 글로 남기든지.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다면,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할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었던 길, 먹었던 음식, 함께 본 영화, 같이 공유하며 읽었던 책에 대해 말해야 한다. 언젠가 다시 한번 걷고, 먹고, 보게 될 경우 그 순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하면 좋지만, 없다면 혼자 해도 나쁘지 않다. 가을로 접어든 지금 이 모든 순간들을 기억에 새기기 위해 오늘 저녁, 한적한 가로등이 켜진 길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 집 근처 아파트 단지도 나쁘지 않다. 초록이 여전한 나무들을 오랫동안 눈여겨보는 것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일기장이든 브런치든 어딘가에 적어놓는다면 금상첨화겠다.


작가만큼은 완성도 높은 글을 쓸 수는 없겠지만, 그런 시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진다. 꼭 소설가가 안돼도 좋고, 글이 유려하지 않아도 괜찮다. 쓴다는 것 자체로 충분하니까. 이 글을 쓰면서 어젯밤에 Ruth B.의 음악을 들으며, 걸었던 길을 떠올렸다. 서늘해진 밤공기,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길,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한 나뭇잎들. 무겁게 시작한 발걸음이 집에 돌아올 무렵에는 가벼워졌다. 어제는 그렇게 2022년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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