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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Feb 22. 2023

검사의 사명

'사명', 회사의 이름을 의미하는 '社名'이 아니라 '使命'을 말한다. 영어로는 'mission'이라고도 하는데 오늘 이 말을 하는 건 얼마 전 '사명'에 대해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20대로 보이는 남자들이었다. 아마 ‘취준생’,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 같아 보였다. 한 사람이 말한다. "그래도 그 일은 내 사명과 맞지 않은데?" 그러자 곁에 있던 사람이 "사명은 무슨? 사명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돈 많이 벌고 일 적은 곳이 최고야." 갑자기 잊고 살았던 ‘사명’이란 말을 들으니 생각이 복잡해졌다.


나는 20대 후반, 비교적 젊은 나이에 검사가 되어서 아주 오랜 기간 검사로 살았다. 검사가 되기 위해 법무부에서 면접을 볼 때 이야기다. 면접관으로부터 "왜 검사가 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준비되었던 답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임명장을 받고 검사 선서를 하면서 질문이 약간 바뀌었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었다. '어떤 검사가 되어야 할까? 바람직한 검사의 모습은 무엇인가?'


그때까지만 해도 직업인으로서 검사의 사명이 무엇인지 막연한 각오만을 다졌지, '구체적으로' 생각하진 못했다. 그렇다고 주변에 롤 모델로 삼을만한 검사도 눈에 띄지 않았다.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정의를 실현하는 것, 거악을 척결하는 것, 딱 그 정도였다.


시간이 흘러 일이 익숙해질 무렵, 초심은 어느덧 사라지고 산더미처럼 밀려오는 일에 하루하루를 견디기에 급급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그날도 일 때문에 밤 12시가 넘어 퇴근하면서 문득 ‘내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피곤에 쩔은 스스로를 위로하고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뭔가 내가 하는 일에 명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마음을 추스르고 각오를 다지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초 마음먹었던 다짐이 추상적이다 보니 현실에서 실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적어도 내게 검사라는 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후가 더 중요하다. 내가 하는 일에 어떤 동기와 의미를 부여할지는 선택이 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택의 결과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사명이 정작 필요한 건 그때다. 위기의 순간, 갈등으로 힘들 때. 내가 하는 일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는 대의, 그게 바로 사명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읽었던 김훈 작가의 글이다. "만약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나에게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고귀함을 언어로써 증명하는 것이다."


'인간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고귀함을 언어로써 증명한다', 작가다운 멋진 표현이다. 계획에도 없었던 법대를 가게 되었고, 얼떨결에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검사로 살았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직업인으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내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는 것만큼 뜻깊은 일도 없다. 대개는 나처럼 별생각 없이 직업도 갖게 되고 일도 하게 되지만. 그러다 보니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쉽게 지치고 만다.


생각 없이 살다 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처음 출발할 때도 사명이 필요하지만, 중간중간 끊임없이 사명을 생각하고 되새겨야 하는 이유다. 바쁘게 살면 사명을 잊고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기 쉽기 때문이다.


사명이 꼭 거창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 알 수 없듯이 내가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한 문장이니 단어 몇 개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미사여구이거나 추상적일수록 실천하기 어렵거나 공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믿고 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사명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살면서 그 사명을 찾아야 하고 내가 하는 일이 별 볼 일 없어도 사명을 잊지 말고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것을.




돌아보면, 내 딴에는 정의로운 검사가 되려고 노력했다.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으려고 사람들을 멀리하고 청렴한 삶을 실천하기 위해 외로움도 자처했다. 특수부 검사로서 소위 거악이 관련된 '게이트' 사건을 수사하면서 나름 소신을 지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건 내 생각일 뿐, 언제나 검사 서영수에 대한 평가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에게도 아쉬운 점이 많다. 검사를 그만둔 후 잠깐 변호사를 했지만 그것도 평생 해온 검사의 정체성과 맞지 않아 사건을 수임하는 변호사는 그만두었다. 무엇보다 후배검사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검사를 그만둔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내 사명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앞으로 나에게 남은 사명은 무엇일까. 김훈 작가의 표현을 빗대 내 사명을 말하자면 이렇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나에게 사명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고귀함을 내 삶으로 증명하여 주변을 빛나게 하는 것이다." 그 젊은이들도 원하는 직업을 얻어서 그들이 꿈꾸었던 사명을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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