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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n 21. 2024

문제는 나, 글이 아니었다

가끔 이곳에 쓴 내 글들을 읽을 때가 있다. 몇 년 전에 쓴 글을 읽다가 발견한 어색한 문장, 적합하지 않은 표현을 보면서, 그때 왜 이렇게 못썼을까 하는 마음에 불편해지기도 한다. 거울 속의 나를 보는 느낌이랄까. 어색하고 이상하다. 여기 올리는 대부분의 글이 짧은 시간, 즉 새벽에 쓰고 아침에 올리다 보니 충분히 숙고할 시간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 저녁에 그 글을 다시 읽어보면 고쳐야 할 부분이 여전히 눈에 띈다. 하루 사이에 같은 글에 대한 생각이 두서없이 변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잘 쓰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마음에 떠오르는,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득해진다. 꾸준히 뭔가를 쓰지만 그 뭔가가 나를 얼마나 바꿨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고. 그런 마음이 들 때면 의욕이 사라지면서 이제 그만 쓸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럼에도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나와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처음에 했던 다짐, 즉 목적과도 관련이 있다. 작가처럼 글을 잘 쓰기 위함이 아니라 내면에 숨어 있는 생각, 즉 나를 끄집어내기 위함이었다. 가급적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해지려고 노력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한편으로 수시로 떠오르는, 잠깐 있다가 사라지고 마는 상념이나 생각들을 붙잡아두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어떤 글이든, 결국 문장은 자신에 대한 고백이다. 글은 쓰는 이를 닮는 것이다. 내 글이 재미가 없다면 글이 바로 내면, 즉 나 자신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이 본래 무료하고 재미가 없기 때문에 그런 상태가 글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지 글이 아니다. 답답한 것은, 변함없는 나 자신일 뿐이다.  


문제는 글을 잘 쓰지 못하는 것보다 내 감정과 생각에 충실하지 못할 때, 특히 재미없는 나를 숨기려고 그렇지 않은 척 기교를 부릴 때이다. 그런 글은 쓰고 나서도 뭔가 찝찝하다. 표현력이 부족한 것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을 흉내 낼 때가 더 불편했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이라도 그 순간 내 마음을 담아 최선을 다해 썼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겨야 한다. 뭔가를 꾸미면 나를 포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 이렇게 말했다. "능숙하다든가, 서투르다든가, 재주가 있다든가, 없다든가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깊이 배려해준다… 그게 중요하죠. 마음을 안정시키고 여러 가지 상황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는 것. 마음과 머리를 늘 열어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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