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한돌별곡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by 신윤수

책세상, 20150115, 정동호 옮김이다.

크게 4개의 부로 구성되었고, 그 주제가 다분히 ‘비철학적’인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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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 뒤돌아보는 것,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며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20쪽, 머리말)


형제들이여, 너희의 덕의 힘을 기울여 이 대지에 충실하라! 너희의 베푸는 사랑과 너희의 깨침으로 하여금 이 대지의 뜻에 이바지하도록 하라! 나 이렇게 너희에게 당부하며 간청하노라 (127쪽, 베푸는 덕에 대하여)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위버멘쉬가 등장하기를 우리는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우리가 위대한 정오를 맞이하여 갖게 될 최후의 의지가 되기를!” (131쪽, 베푸는 덕에 대하여)


아, 하늘과 땅 사이에는 시인들만이 꿈꿀 수 있는 것이 많이 있구나!

특히 하늘 위에는, 신들은 하나같이 시인의 비유이며 시인의 궤변이기 때문이다!

진정, 우리는 언제나 위로 끌려 올라간다. 구름 나라로. 우리는 구름 위에 알록달록한 껍데기들을 앉혀놓고는 신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위버멘쉬라고 부르기도 한다.

저들은 구름 위에서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가볍다! 저들 모든 신과 위버멘쉬는.

아, 나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주장되고 있는, 저 터무니없는 것 모두에게 얼마나 지쳐 있는가! 아, 나 어찌 그토록 시인들에게 지쳐 있는가. (217쪽, 시인에 대하여)

관능적 쾌락, 지배욕, 이기심, 이들 셋이 지금까지 가장 혹독하게 저주받아왔을 뿐만 아니라 가장 고약하게 비방 받고 왜곡되어 왔던 것들이다. (311쪽, 세 개의 악에 대하여)


그런 신이라면 사라져라! 신이 없는 것이 낫다. 이제 자신의 손으로 운명을 개척할 일이며, 차라리 어릿광대가 되고 차라리 내 자신이 신이 될 일이다! (429쪽, 실직)


(다시 한번) (모든 영원 속으로)

오, 사람이여! 귀담아 들어보아라!

깊은 자정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

“나 잠을 깊이 자고 있었노라, 나 잠을 자고 있었노라-,

“나 깊은 꿈에서 깨어났노라-

“세계는 깊다.

“그리고 낮이 생각한 것보다 더 깊다.

“그것의 비애는 깊다:

“기쁨- 그것은 가슴을 에는 고뇌보다 더 깊다.

“비애는 말한다: 사라져라!

그러나 모든 기쁨은 영원을 소망한다-

-깊디깊은 영원을 소망한다!“

(532~533쪽, 몽중보행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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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의 산중 명상을 마친 차라투스트라는 그가 터득한 새로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인간 세계로 내려온다. 이렇게 시작되는 차라투스트라의 편답과 가르침은 그때그때 등장하는 인물들과 나누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등장인물도 아주 다양하며 하나같이 특이하다. 숲속의 성자, 줄타는 광대, 죽음의 설교자, 시체를 매장하는 자, 예언자, 마술사, 제 발로 거지가 된 자, 사막의 딸 등이 있다. 거기에다 독수리, 뱀, 낙타, 용, 독두꺼비, 악어, 타란툴라, 공작, 올빼미, 거미, 불개, 방울뱀, 호랑이, 비둘기 따위의 동물과 사과나무, 무화과나무, 야자나무가 나온다, 바다와 섬, 사막과 오아시스도 등장한다.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나이 서른에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명상의 길로 간다. 이것은 예수가 그의 나이 서른에 고향 마을 나자렛과 그 고장의 호수 갈릴리를 떠나 구도자의 길로 나선 것을 떠올려 준다. 예수가 아무 생명력이 없는 황야로 간 것과는 달리 차라투스트라는 상승의 기운이 있고 천하를 굽어볼 수 있는 산으로 간 것, 예수가 고작 40일 간 명상을 한 것과 달리 차라투스트라는 10년간 명상을 한 차이가 있다.


우주운행의 영원회귀, 새로운 인간유형인 위버멘쉬(Übermensh)인데 그 난해한 점은 차라투스트라를 이해하는 것이다.


철학사적 구분에 의하면 니체는 생철학자며 그의 철학은 생철학이다. 생철학은 인간의 생을 그것을 초월한 모든 가정을 물리치고 그 자체로부터 이해하려는 철학이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생을 모든 철학적 인식과 인간활동이 그 뿌리를 박고 있는 마지막 거점으로 보고 그것을 그것 밖에 있는 관점으로부터 파악, 평가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하는 철학이다.


여기서 생의 일차적 의미는 생명이다. 니체에 따르면 생은 우리에게 직접 주어져 있는 유일한 현실로서 약동하는 힘이자, 풍요요 기쁨이 샘이다. 자연에 대한 긍정이요 그 자체가 힘에의 의지이기도 한다. 즉 다른 어떤 것의 수단이 될 수 없는 자립성과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생의 목적이 저편의 완전하며 영원한 세계에 이르는데 있다. 그 결과 우리가 누리는 이 땅에서의 생은 구차한 것, 죄스러운 것이 되어버렸고 저편의 세계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인간의 세계로 내려온 차라투스트라가 전한 것이 신의 죽음이다. 신의 죽음과 더불어 그간의 이원론적이며 목적론적인 세계관도 무너진다.


니체는 신이 없는 이 세계를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계기를 통해 재론한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수용한 그는 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일정량의 에너지라고 보았다.


에너지는 본성상 끝없이 운동한다. 에너지의 운동이 그 본성상 영원하다면 시간 또한 영원할 수밖에 없다. 유한한 공간 속에서의 무한한 시간, 이것이 니체가 받아들이고 있는 세계다. 밖으로 닫혀 있는 이런 세계에 새로 끼어들 것도, 새삼 밖으로 소멸할 것도 없다. 가능한 것은 에너지의 끝없는 운동에 의해 촉발되는 만물의 영원한 이합집산뿐이다.


영원회귀는 알파에서 오메가로 이어지는 목적론적 세계관 속에 안주해온 인간을 허무주의로 내몬다. 최종 목적이 없는 영원한 순환이 끝내 인간에게 극단의 권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니체는 오늘날 인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태어나 이 대지의 주인이 되어 인류의 미래를 떠맡아야 한다고 보았다. 모든 생에 적대적인 형이상학 가식을 버리고 사실 그대로의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그리하여 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영원회귀가 야기하는 허무주의를 극복할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위버멘쉬다. 역사적 과업에 역행하는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 상대적 의미에서 일정 수준에 이르기는 했지만 결코 그 이상이 아닌 ‘보다 지체가 높은 인간’도 위버멘쉬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기위해 차라투스트라가 설정한 인간유형이다


힘에의 의지, 존재하는 것은 하나같이 힘을 향한 의지를 갖고 있다. 존재하는 것은 하나같이 힘을 향한 의지를 갖고 있다.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해 분투한다. 이런 분투는 경쟁을 일으키고 끝내 힘겨루기로 발전한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만물의 존재 원리로 받아들여 신성시했다.


위버멘쉬는 새로운 신인가? 그렇지 않다. 초월적 존재라는 이유에서 종래의 신을 거부한 니체가 인간 위에 새로운 신격을 끌어들였다면 자기모순이다. 위버멘쉬는 새로운 신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이 지상에서 구현해야 하는 이상적 인간유형이다. 즉 어떤 특정 존재나 확정된 지위가 아니라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끝없는 자기 극복을 통해 성취해야 할 개인적 이상이다. 불교에서 해탈이 개인적 이상인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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