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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윤수 May 20. 2024

핵무기에는 핵무기뿐, 우리도 준비하자(『핵의 변곡점』)

우리나라 선거(총선)가 4월 10일에 끝났는데, 이번에는 11월 미국 선거다.     


혹시라도(아니 높은 확률로) 트럼프가 재집권하면 주한미군이 철수하느니 막대한 분담금을 요구받을 거라느니 이야기가 무성하다.     


우리도 튼실하게 준비해야 한다. 자주국방과 핵무장, ‘힘에 의한 평화’ 전략이다.

1. 일본처럼 (핵물질 재처리를 마치고) 핵무기 직전 상태로 준비하자.

2. 호주처럼 핵추진잠수함을 건조하자.

3. 대만처럼 군 의무복무기간을 (병역법에 정한 기간으로) 연장하자.

4. 이스라엘, 노르웨이처럼 여성도 국방의무에 종사토록 하자.  

5. 해상교통로 사수를 위하여 중(中) 항공모함을 만들자.     


내가 보기로 북한 핵과 관련된 과거 논란은 중요하지 않다. 어느 정부의 어떤 정책이 잘되어 (또는 잘못되어) 북한이 핵 보유를 하게 되었느니 하는 이야기 말이다. 내가 보기로 우리 쪽 사정은 큰 변수가 아니었다.     


북한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하여, 오래전부터 핵무기를 만들어 왔다. 작년에 나온 책이 이 부분을 잘 설명한다. 이번 글은『핵의 변곡점』 (Hinge Points)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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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의 변곡점마다 미국이 변심했다     


『핵의 변곡점』은 북한이 핵무기를 완성하게 되기까지 결정적 순간을 이른다.       


미국 핵물리학자 시그프리드 헤커가 쓴 『핵의 변곡점』(창비, 2023년 10월)은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그는 북한에 여러 번 갔고 핵개발 현장도 참관하였다. 중요한 부분을 책에서 발췌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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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부터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1961년 소련 및 중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음에도, 또 미국과 남한 간의 방위조약이 체결되었음에도 북한을 자국의 안보를 이웃 강대국들 손에 맡길 생각이 없었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군대 중 하나를 키우고 폭탄 제조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폭탄에 관한 김일성의 관심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몇몇 연구자들은 한국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는 미국을 보고 그런 관심이 생겼으리라는 가정에 무게를 둔다.’ (52~53쪽)     


‘평양은 과학 일반 분야에서 기술자와 과학자 들을 양성하기 위해 일찍이 1952년 모스크바와 협력 협정을 맺었다. 대학원생을 비롯한 북한 출신 학생들에게 소련의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교육받을 기회를 제공하는 협약이었다. 1952년 12월 아직 한국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도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산하에 원자력 연구기관을 설립했다. 북한과 소련 간 협력은 소련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 우산 아래 크게 확대되었다.’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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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늘 이중경로 전략을 채택하였다     


‘핵개발 과정과 정치 상황 전개가 어떻게 교차하고 갈라서는지 양쪽의 추이를 나란히 놓고 추적해보니, 북한이 외교와 핵개발이라는 이중경로전략을 추구해왔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위싱턴이 외교적·기술적 요인들의 특정한 조합이 초래하는 득실을 재는데 실패한, 내가 ‘변곡점’이라고 부르는 여러 핵심 사건들을 지목할 수 있었다.       


북한이 핵개발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외교를 이용할 뿐이라는 워싱턴에 팽배한 시각과 달리, 1990년대 초부터 외교를 통해 미국과의 장기적인 전략적 관계를 모색한 것은 다름 아닌 북한의 국부 김일성이었다. 북한이 러시아와 중국 모두로부터 버려진 듯, 심지어는 위협받는 듯 느끼던 시기, 그 냉전의 마지막 순간에 펼쳐진 극적인 지정학적 대변동 속에서 김일성이 보기에 생존을 위한 최선의 길은 워싱턴과의 화해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화해는 유약함이 아니라 힘을 바탕으로 이루어야 한다고도 역설했다.      


이 당시 북한의 경제력과 재래식 병력은 날이 갈수록 남한에 뒤떨어졌고, 당연히 미국에는 한참 뒤떨어져 있었다.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핵 프로그램이었을 것이며, 결국 그것이 북한 정권의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외교와 핵개발을 동시에 추구하기로 선택함으로써, 북한은 어느 한쪽 노선에서의 실패에 대비하고 냉전 이후 국제체제의 변동과 자국의 권위주의적 국내 정치에 내재한 위험을 줄일 수 있었다.’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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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남갈등이 남북문제 해결을 방해한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대북정책이 바뀐 것이 평화와 통일도 다 방해해 왔다. 2차 대전 패전 후 1945년에 분단되었다가 1990년에 통일에 이른 서독은 동독 관련 정책을 동방정책 (Ost-Politik, East Policy)이라고 불렀는데, 집권당이 바뀌더라도 대 동독정책의 대강은 지키려 노력했다.     


우리는 정부가 바뀔 때마다 대북정책이 바뀐다. 그런데 내 기억으로는 이번 정부처럼 드러내 놓고 통일·평화가 아니라 전쟁준비를 강조하고 주적(主敵)이라고 칭하는 정부는 없었다. 공산왕조, 김씨 세습정권은 오히려 남쪽의 변화를 활용하고 있어 보인다. 이것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요인 중 하나다.    


대북정책에는 국회와 정부, 여당과 야당이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 지금은 총선이 끝나고 22대 국회가 시작될 시점이다. 2년 후 지방선거까지 정치에 북한문제를 이용할 소지가 작은 지금이 적기 아닌가. 지금부터 새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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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1994년) 우리(존 루이스, 시그프리드 헤커)는 중국에서 열린 동북아시아의 안보와 안정을 주제로 한 세미나에 참석했다.     


---중국의 전직 외교관들과 퇴역 군 간부들은 중국이 북한의 폭탄 제조에 반대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막기 위해 김씨 정권을 무릎 꿇릴 생각은 없다고 주장했다. 평양이 폭탄을 보유하려 하는 것은 주로 워싱턴 탓이라고 했다. 그들은 베이징이 최근의 위기 상황에 개입한 것은 공정한 중재자로서 북미 간의 군사 대립을 막고자 함이었지 워싱턴을 거들려던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베이징의 최우선 관심사는 오로지 비핵화만 밀어붙이는 워싱턴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세미나에서는 한 중국 핵 과학자가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관한 놀랍도록 통찰력 있는 기술적 진단을 발표했다. 북한은 이미 수십년을 핵무기 프로그램 개발에 투자했다는 것이 그의 주요 결론이었다. 그는 북한이 핵폭탄 제조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고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 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는 핵무기를 구축하는 일에도 관심이 있다고 단언했다.’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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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주장은 상식적이다     


북한이 엉터리이고 허튼 주장을 한다는 우리의 선입관이 잘못되어 있어 보인다.      


‘김계관은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제시했다. 비핵화와 관계 정상화의 연계, 평화로운 핵에너지를 사용할 북한의 권리가 그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들이 핵무기와 핵무기 프로그램의 모든 부문을 포기할 전략적 결정에 도달했다고 반복해 얘기했다. 그는 미국이 비핵화를 북한만이 해야 할 일이라고 보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평양은 한반도 전체가 비핵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178쪽)     


‘김계관은 (1993년 6월) “우리의 입장은 아주 확실합니다. 관계가 정상화되고 더 큰 신뢰와 함께 미국의 위협이 없어지면 우리는 우리의 핵무기 전부를 포기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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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핵 보유 국가가 되었다.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첫 번째 핵실험을 하고, 이로서 세계에서 여덟 번째 핵 보유국가가 되었다. 그동안 6차례 북한은 핵실험을 하였다.     


‘중국은 북한의 핵실험에도 불만이 있었지만 그 책임을 바로 부시 정부에게로 돌렸다. 평양을 향한 적대적 정책과 제재 조치 탓이라는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 것은 미국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그들은 말했다.’      

‘---그들이 보기에, 1998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실험에서 북한이 얻은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처음의 규탄이 지나가면 결국은 핵보유국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중국이 북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며 이제는 미국이 평양에 양보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253쪽)     


핵무기를 가진 북한은 이걸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 핵보유국이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략을 받은 것은 핵무기 포기 때문인 걸 아는데, 북한이 지금껏 힘들여 만든 핵을 쉽사리 포기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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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에서 미국은 이렇게 행동했다     


‘첫째, 2기 부시 정부부터 지금까지 워싱턴은 북한 핵 프로그램의 고삐를 죄기 위해 중국과 제재 강화에 의존했다. 그것은 실패였다. 평양을 남한 쪽으로 끌어당기기보다는 중국 쪽으로 밀어버렸다.     


둘째, 워싱턴은 남북 간 관계 증진에 더해 경제, 교육, 문화적 대화를 포함하는 한반도 평화에 대한 전체론적 접근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미국의 정책은 비핵화에만 초점을 맞추어 추진되었다. 평양은 핵무기 폐기에는 반드시 관계 정상화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확히 해왔다.     


셋째, 북한이 꾸준히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음에도 미국은 북한을 최우선 안보 현안으로 삼지 않았다.’ (5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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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피지기, 자주국방과 핵무기      


미국은 우리를 일본의 방파제 또는 동북아에서 미군의 주둔 명분 등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언제라도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고, 핵우산을 걷어버릴 수 있다. 트럼프의 재집권이 아니더라도, 4년 후에는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우리가 튼실히 대비해야 한다.      


미국의 ‘핵우산’이나 ‘북한의 핵 공격 시 미국이 대신 핵보복’이라는 정책은 북한의 미국 본토에 대한 핵 공격 위협이 우려되는 순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우리는 북한의 공산통일 대상이나 핵인질이 되고 만다.


우리가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근본적 해결책이다. ‘핵에는 핵뿐’이라는 것은 역사적 진리다. 그러나 핵무기를 완성하려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이에 따른 국제적 제재가 우려되니까 우선 일본처럼 핵무기 직전 상태에서 준비해두자는 것이다.     


주변 나라를 보자. 중국과 러시아는 핵무장 국가, 일본도 핵무기 직전 단계로 준비되어 있는데, 우리가 중국·러시아 또는 일본과 협상력을 가지기 위해서도 우리도 튼실해야 된다.       


또한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에서 우리가 엄정 중립을 지키려 해도 유사시에 대비한 자주국방이 요구되며,  일본(핵무장 직전 단계)과 호주(핵추진잠수함 건조)처럼 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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